'차별'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3.10.03 나는 뜨겁게 보고 차갑게 쓴다
  2. 2011.04.04 기록10. 인권운동의 '공간'을 마련하자
  3. 2011.02.27 기록7.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2
  4. 2011.01.14 기록 2. 소수자 집단의 ‘피해의식’ 어떻게 볼 것인가
  5. 2011.01.05 기록 1. 우리는 동등한 존재인가?

나는 뜨겁게 보고 차갑게 쓴다

자유 게시판 2013. 10. 3. 17:49

 

『나는 뜨겁게 보고 차갑게 쓴다』

-세상과 사람과 미디어에 관한 조이여울의 기록 

291쪽/ 판형 170*224 /값 15,000원
 

여성 저널리스트가 뜨거운 시선으로 발굴한 한국사회 

“이 책은 ‘여성’의 문제에서 출발하지만 노동, 동물, 환경, 농업, 생명윤리, 평화 등의 주제들과 끊임없이 교차시킴으로써, 여성주의의 전통적 쟁점들이 ‘인간’의 보편적 가치들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복잡한 이론을 동원하거나 사실을 나열하는 대신, 때로는 저자의 맛깔스러운 이야기로, 때로는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인터뷰이의 입을 통해 문제의 핵심을 드러내 보여주고,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이 책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한국 사회 의제를 어려운 이론을 빌리지 않고 “인간의 긍정적인 힘”이나 “용기”, “믿음”과 같은 가치들과 결부시켜 설명해간다. 이 책이 재미있는 대목은 이 부분이다. 기존의 언론에서 사회 문제를 읽어내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제3의 시선’으로 사회를 읽어내며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현장과 사람들의 생생한 인터뷰에서 저자가 주요하게 포착하는 인간의 내면적 가치를 끌어올린다. 

“기억 저편에 은폐된 사실과 묻힌 역사를 발굴하여 진실을 수면 위로 드러내고 생생한 현장을 복원해내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 저널리스트로서 그 역할을 해나간다는 것이, 그 과정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통찰력과 가슴 설레는 영감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이, 내게는 무척 큰 기쁨이고 영광이다.” (p.189) 

저자의 이 말은 <3장 발굴>의 발문에 수록된 글이다. 한국 사람들이라면 다 알만한 ‘3.1운동’이나 ‘제주도 해녀’, ‘황우석 사태’를 주제로 삼으며 “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라고 말한다.

그는 역사적 사건들에서 그 사건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진실이 어떻게 숨겨지고, 은폐되어 있는지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그리고 과거의 사건들을 현재와 연결시켜 그 사건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계속 영향을 주는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차근차근 설명해나간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에는 해결의 열쇠가 있다”고 힘주어 주장한다.  

저자의 뜨거운 시선을 좇아가다 보면 노동, 사형제, 성매매, 환경, 소수자 인권, 평화 등 쉽게 풀리지 않을 듯한 실타래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저널리스트가 10년이 넘게 발굴한 한국 사회의 속살을 만나면서 한 시대의 문제를 공감하며 성찰적인 논쟁을 지필 수 있을 것이다.
 

조이여울 기자가 차갑게 써 내려간 10년의 기록

“조이여울 기자는 대한민국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단지 다른 기자들은 눈여겨보지 않는 소수자들의 삶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단순한 ‘기록자’에 머물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마치 없는 사람 취급 받았던 성 소수자, 입양인, 성폭력 생존자 등 다양한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가시화 했고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진정 ‘이슈 생산자’였고, 가장 주목할 만한 기자였다.”
                                                              -전홍기혜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 편집국장 


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국장이 묘사한 것처럼 조이여울 기자는 ‘이슈 생산자’였다. 특히 여성과 소수자, 인권, 저널리즘 영역에서 영향력 있는 담론을 생성해왔다. 지난 10년간 조이여울 기자의 글과 말에 대해 ‘날카롭다’고 기억하는 이가 많다. 

20대부터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해 논쟁적인 오피니언 리더로 활동해온 저자는 신랄하고 비판적으로 한국 사회에 입을 대왔다. 뿐만 아니라 다른 언론들의 행태와 기사에 대해 비평하는 일도 꾸준히 해왔다. 저자는 특히 다른 어떤 영역보다 미디어에 종사하는 기자들에 대해서 유독 책임감을 더욱 강하게 주문한다. 

적어도 기자라면 세상이 가르쳐준 대로 생각하고, 배움 없이 취재하고, 성찰의 과정 없이 기록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p.261) 

저자는 “저널리스트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 것과 다른 세계관을 만나 부단히 부딪히고 깨지는 작업인 동시에, 그를 통해 끝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저널리스트의 기록은 사회의 그늘지고 어두운 곳에 빛을 쏘이게 하는 작업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 믿음으로 10여 년간 기록한 한국 사회의 초상!

저자와 함께 뜨겁게 보고, 우리 주변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글이 가질 수 있는 힘, 희망

“글이 가질 수 있는 힘 혹은 영향력은 어디까지일까. 문제에 얽힌 전 과정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돌아보고 궁극에 다른 시각을 갖게 하는 것,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힘은 거기서 생겨나는 게 아닐까.
이 책 한 권을 읽은 후 나는 여러 가지로 명쾌해졌다. 시원한 기운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김소희 ‘작은자 야간학교’ 교사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누구나 이 추천의 글에 공감할 것이다. ‘시원하고, 따뜻하고, 재미있다’고. 이 책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로부터 “재미있다”, “시원하다”는 반응을 끌어내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2장 인터뷰>의 예만 들어보더라도 야생동물, 미혼모, 탈핵, 아동성폭력 후유증, 토종씨앗 지키기 운동 등 한국 사회의 뜨거운 현안 이야기들이다. 조이여울 기자는 기록을 하며 사람들을 만나는 작업은 “언제나 즐겁고 생기가 넘치는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무늬를 만들어가는 생동하는 현장이 있고, 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여러 독자에게 공유되고 사회로 확산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기쁨이 있기에, 저널리스트로서 나의 삶은 지지치 않을 것이며 인터뷰 또한 계속될 것이다.” (p.123) 

조이여울 기자가 말하는 기록 작업은 생동하는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며, 거기서 희망을 발견해서 매체를 통해 공유하고 확산시키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즐겁고 생기가 넘치는 작업”의 생생한 기운이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 책은 한 저널리스트의 고뇌에 찬 10년의 기록일 뿐 아니라, 그 기록을 통해 사회 곳곳에서 소리 없이 희망의 씨앗을 뿌려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소중하다.  

 

저자 소개: 조이여울

저널리스트. 20대부터 페미니즘과 사회운동에 대한 논쟁적인 오피니언 리더로 활동해오다 2003년 미디어 <일다>를 창간하였다.
왜곡되거나 날조된 사회적 사건을 재조명하고 은폐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발굴하는 글을 다수 발표함으로써, 주류 저널리즘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며 언론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여성주의 저널리즘, 평화 저널리즘을 교육하는 미디어운동가이기도 하다.
 

차례

여는 글 성찰하는 사람의 글은 따뜻하다 

1장. 기획모든 문제에는 해결의 열쇠가 있다

“우리는 보복이 아닌 회복을 원한다”
-살인피해자 가족이 말하는 사형제와 진정한 치유

스무 살 임씨의 일기장, 그슬린 진실
-섹스산업의 호황 속에 거래되는 여성의 몸

평등하게 일하고 싶다
-노동의 성별 분리와 차별에 대한 보고서

너무 젊지도, 너무 늙지도 말라?
-나이주의, 고용시장을 움직이는 이상한 법칙

‘또 하나의’ 사람, 트랜스젠더
-성 염색체에 갇히지 않는 인간의 다양성에 대하여
 

2장. 인터뷰그들 스스로 말하게 하라

길 위에서 길을 묻다
-야생동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황윤 감독

“한국은 잘사는데, 왜 아이를 포기하는 거죠?”
-한국입양아의 아버지 리처드 보아스, 미혼모 인권을 말하다

핵 없는 미래, 정치 패러다임 변화에 달렸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박진희 소장에게 듣는 ‘녹색정치’의 가능성

“성폭력을 둘러싼 ‘시선’이 변해야 해요”
-생존자 너울이 말하는 아동성폭력의 특성과 후유증

‘오래된 미래’를 심는 사람
-토종씨앗 지키기 운동의 싹 틔운 농부 한영미
 

3장. 발굴 ▶ 숨은 그림, 혹은 은폐된 의미 찾기

이름 없는 수많은 ‘유관순들’을 기억하라
-10대 여성과 기생들이 주도한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며

묻힌 해녀 정신 ‘캔다’
-우리가 몰랐던 해녀공동체의 역사와 삶

여성의 몸은 어떻게 생체실험 대상으로 전락했나
-황우석 사태의 진실을 파헤치다 

4장. 언론비평 ▶ 진실은 어떻게 왜곡되고 가려지는가 

► 뉴스는 포르노다?

특종이란 무엇인가/ 언론이 좋아하는 ‘전문가’/ 신문 기사에서 ‘장애인 찾기’/ 성폭력 보도, 누구의 시선을 대변하나 / 사실 왜곡 일순위는 ‘동성애’/ 어머님의 눈물 보여주려 했다? / 버지니아공대 총기 참사와 한국 언론 / 환경비용 고려하지 않는 ‘그들만의’ 계산법 / 언론이 만든 전쟁은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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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10. 인권운동의 '공간'을 마련하자

일다와 함께 2011. 4. 4. 09:05


인권운동의 ‘공간’을 마련하자

<조이여울의 記錄> (10) <인권센터> 건립 위한 주춧돌을 함께 놓으며

♦ 
인권의식이란, 사회구조에 안주하지 않는 것

 
유엔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이었던 장 지글러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에서 ‘식량의 분배’ 문제를 다룬 바 있다.
 
인류는 이미 120억 인구를 먹일 식량을 생산할 능력이 있음에도, 지구상엔 굶주리는 사람들이 무려 10억에 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식량이 차고 넘쳐 버리는 사람들과, 굶주림에 방치된 채 죽어가는 아이들이 공존하는 지구촌. 이것이 인류가 고안해 낸 정치, 경제시스템이다. 사람의 생명보다도, 기득권층의 권력 유지와 거대식량자본의 이윤 획득이 더 중요한 사회인 것이다.
 
여기서 만약 한쪽에서 버려지는 식량으로 다른 쪽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일단 먹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이 바로 ‘인권의식’이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 바로 이 생각이 ‘가난한 나라에 태어났으니까 어쩔 수 없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원래 기업의 속성 아닌가’ 하며 현재의 불평등한 사회시스템을 정당화하거나 관망하려는 욕구를 앞설 때, 비로소 인류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  인권운동을 지원하는 재단 ‘사람’

▲ 인권센터 건립을 위한 주춧돌 쌓기 http://hrfund.or.kr
 
최근 ‘인권재단 사람’에서 인권운동의 장이 될 <인권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주춧돌을 쌓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인권의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불공평한 사회구조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인권운동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서도.
 
‘인권재단 사람’(이하 ‘사람’)은 국가와 대기업의 지원을 받지 않고 민간자금을 조달하여 만든 재단으로, 인권단체와 활동가들 그리고 인권활동을 지원해왔다.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은 재단을 꾸려가기엔 상당히 적은 액수지만, 정부와 기업의 간섭과 검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사람’은 먼저 재정발전소를 통해, 열악한 재정규모를 가진 인권단체들이 후원회원을 보다 쉽게 모을 수 있도록 CMS(자동이체) 업무를 대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후원인 모집을 위해 별도의 인력이나 예산을 배치할 수 없는 작은 규모의 인권단체들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절실한 요구는 없었을 것이다.
 
이 제도를 활용하고 있는 단체들은 국가폭력을 고발하고 피해자를 지원하는 모임, 빈곤 문제에 대응하는 단체, 평화운동단체, 청소년, 시설장애인, 동성애자, 외국인노동자, 노숙인 등 소외된 이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모임 등 52개 조직들이다.
 
대안매체를 만들고 여성주의 저널리즘을 실천해온 <일다>의 활동 역시, ‘인권재단 사람’ 의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계속될 수 있었을지 미지수다.
 
♦  ‘공간’의 분배
 
지금, 인권재단 사람은 재정발전소에 이어 ‘공간’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인권단체들에게 사무실, 상담실, 교육장, 회의실, 공연장 등을 제공하기 위한 <인권센터>를 100평 규모로 장기 임대하기 위해, 올해 10억을 모금한다는 계획이다.
 
인권단체들은 아직 안정적인 사무 공간을 마련하지 못한 곳들이 많다. 있다 해도 활동가 몇 명이 모이면 꽉 차는 집무실 규모이다. 회원들과 만날 공간이나 토론회, 공개모임을 열 마땅한 장소가 없어 활동에 큰 제약이 따른다.
 
<일다>에서도 독자들과 만남을 가지려면 장소가 늘 문제가 되었다. 상시적인 교육장이나 회의실이 있었더라면 곧바로 준비단계로 옮겨갔을 행사들이, 논의되다 기획단계에서 그치고 만 적도 많다.
 
그러니 시청 군청 등의 관공서와 각종 지방자치단체 관할 건물들에 비워둔 채 있는 공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무슨무슨 회’ 이름의 옛날 활동했던 조직들이 지금은 간판만 붙이고 굳게 문이 잠긴 채 장소만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행정시스템의 완고함에 고개를 내젓게 된다.
 
이처럼 공간이 아쉬웠던 지라, ‘사람’의 <인권센터> 만들기 모금운동 소식을 접했을 때 그것이 인권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힘일 되어줄 수 있는 프로젝트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나아가 인권재단 사람은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고, 동성애자가 위협을 느끼지 않고 모일 수 있는 공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는 공간, 국가폭력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해줄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인권센터>의 운영 원칙과 방식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사람과 사람의 뜻이 모이는 과정이 곧 열쇠를 만드는 길이 될 거라고 믿는다. <인권센터>를 건립하기 위한 ‘주춧돌’을 함께 놓으며, 더불어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주제와 형태로 인권운동을 하는 모임들이 생겨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열려라! 인권센터 (주춧돌 참여하기) http://hrfund.or.kr

<일다> 2011년 4월 4일에 실림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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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7.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2

일다와 함께 2011. 2. 27. 14:23
여성과 소외된 이들에게 발언권을
<조이여울의 記錄>(7)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2 
 
[올해 초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 편집위원회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여성주의자로서 언론활동을 한다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청탁서였는데, 그 안에는 현재 대학에서 여성주의 매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진솔하고도 소중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나는 흔쾌히 지난 10년 간 저널리스트로 살아오며 ‘여성주의 저널리즘’에 대한 생각하고 실천한 내용과,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들을 정성껏 담아 회신했다. <석순> 측의 동의를 구해, 우리가 서로 나눈 편지의 내용을 재탈고의 과정을 거쳐 <일다> 독자들과 공유한다. 먼저 석순이 보내온 편지를 개재하고, 이어 나의 답신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공적인 장 마련하기
 
언론의 객관성과 공정성에 관한 ‘여성주의 저널리즘’의 태동과 역할에 대해 앞서 이야기했지요. 그럼 이어서 여성주의 저널의 특성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여성주의 매체는 여성들과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게 공적인 장을 마련해주고, 공감의 힘을 바탕으로 위로와 지지를 보냅니다. 한편으로 그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적인 차별과 억압을 드러내어 변화를 촉구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성주의 저널이 비단 여성들만의 이야기를 담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사회적으로 조명이 필요한 인권 사안을 다룰 때, ‘성별을 따지지 않는 것’이 또한 여성주의입니다. 여성들이 공적인 장에서 목소리가 약하기 때문에, 안심하고 크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펼쳐 제공해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에요. (사적인 대화는 어쩌면 남성들에게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일다>를 통해 다양한 필자를 발굴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여러분이 편지를 통해 이야기한 대로, 여성주의 저널에서는 특히 당사자들의 경험이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다른 곳에선 들어주지도 않고 쉽게 왜곡했던 이야기들을 존중하지요. 그 동안 차별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터놓고 얘기할 곳이 없었던 여성들에게 말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고 공감함으로써 지지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공감의 힘은 결코 작지 않다고 생각해요.
 
나아가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서 연애로 미화되기 쉬운 ‘스토킹’에 대해서, 피해경험자가 직접 얘기하면 설득력이 있지요. 동거가 이슈화되었을 때도, 동거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얘기해버리면 그게 호들갑 떨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지요. 낙태 논쟁에서도, 인공임신중절의 경험이 무엇인지 담담히 기술한 글을 접하게 되면 살인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무색해질 때도 있습니다.
 
전문성 부여하기
 
여성주의 저널은 ‘전문가 집단’의 전문성에 대해 의문을 던져보기도 하고, 여성들 혹은 소수자들이 전문가로서 발언할 수 있도록 발언권을 줍니다. 자신이 직접 겪고 체득한 문제에 대해 사회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꼭 어떤 직위나 학위 또는 자격증이 필요한 것은 아닐 테지요. 그럼에도 한국사회에선 많은 사안에 있어서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되어야 할 ‘당사자의 목소리’가 묻혀버리곤 하는 아이러니를 많이 접하게 됩니다.
 
물론 전문가 집단이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한국사회에서 너무 과대평가 되어있다는 점에 대해서, 그리고 그 전문가 집단의 경험이 여성과 소수자의 경험과 동떨어져 있어서 해당분야에 대해 오히려 시야가 좁을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지요.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또 당사자가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그것을 이야기해줄 사람들도 필요합니다.
 
여성주의 저널은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요. 평등하지 않은 사회이니까요. 그런데 그 비판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가부장적인 제도나 시스템에 대해 날카롭게 날을 세울 때도 있지만, 언제나 그 바탕에는 다른 대안은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실행가능한지에 대한 정보를 놓치지 않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바탕이 없을 때 비판은 소모적이 되기 쉽지요.
 
나는 제도적 불평등이나 차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글이 여성들보다 남성들에게 더 환영 받는 모습을 종종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비판에는 언제나 일정 정도의 선정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물론 대부분의 기사는 독자들의 눈을 잡아 끌기 위해 선정성을 조금씩은 내포하고 있지요. 하지만 나의 경험상, 매체의 보도가 선정적인 만큼 그 내용은 허망해집니다. 과연 이것이 내가 바랐던 반응인가? 회의가 들 때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좀더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언론의 비판 기능은 생명력이지만, 대안을 만들어가는 현장을 직접 보여주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고 말입니다.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제시할 때, 우리의 지향은 훨씬 더 설득력을 얻습니다. 그것이 비판의 대상들까지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 말이지요.
 
새로운 언어 만들기
 
편지 내용에서 ‘언어 사용’과 관련하여 여러분이 고민하고 있는 내용, 특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것 같아서 말이지요.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지 않은 내용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짧게 설명하기가 어렵지요. 동성애, 성 정체성, 호모포비아와 같은 ‘성적 소수자’ 관련 기사의 예를 들어보지요. 사실 ‘소수자’나 ‘정체성’이라는 말도 쉬운 개념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적 소수자’ 또는 ‘성 정체성’이라니, 기본적인 기사의 카테고리조차 배경설명이 필요한 어려운 언어입니다. 동성애자의 인권에 평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야 쉽게 파악할 수 있겠지만, 정보를 별로 갖지 않은 다수의 독자들에겐 당최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고민하며, 초기에는 ‘성적 소수자 관련 용어 설명’ 기사를 별도로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꾸준히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또 하고, 그러면서 독자들이 관심만 갖고 본다면 이 개념에 익숙해질 수 있기를 바랐지요.
 
<일다>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재일조선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재일조선인, 그들이 누구인지 그 존재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사실상 재일조선인의 존재와 그들의 현재 모습을 알려면, 우리 역사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게 쉬운 작업이 아니지요. 그렇다고 배경설명을 건너뛰고 재일조선인 관련 사안을 다루면, 읽는 사람 마음대로 내용이 각색되어버립니다. 짤막한 보도로 접근할 수 있는 내용은 한계가 너무 컸습니다.
 
그래서 <일다>에서는 재일조선인 당사자들이 직접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글(특별기획-“재일조선인 여성 림혜영, 조경희로부터 듣다” 2008년 3월-7월)을 10회 이상 연재했는데요. 독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았다면, 아마 많은 것을 배우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겁니다. ‘관심’이라는 그 자발성까지 언론에서 책임을 질 수는 없는 일이지만, 최대한 독자들 눈높이에 맞춰 호소력 있게 다가가려고 노력을 기울이는 몫은 우리에게 있다 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새로운 언어 만들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장애인을 비하하는 느낌을 담고 있는 “병신”이라는 말은 가급적 쓰지 말기로 하고, 젊은 여성들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도 이제 좀 자제하고, “편부”나 “편모”라는 부정적인 어감의 용어 대신 “한부모”로, “미혼”보다는 “비혼”이라고, “폐경” 대신 “완경”이라고 용어를 바꿔 쓰기로 하자는 등의 흐름이 계속되어 왔지요.
 
마땅한 언어가 없던 상황에서 적절한 용어를 새로 만들고, 특히 부정적인 용어를 조금 더 긍정적인 용어로 바꿔 사용하고 퍼뜨리는 작업은 언제나 환영할 만합니다. 언론은 이를 더 확장해주는 역할을 해야겠지요. 매체는 당연히 교육의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교조주의라고 할 수 없지요. 우리는 평생 배워가는 존재이고, 자신이 아는 것만 재확인하려고 언론을 활용하는 게 아니니까요. 언론은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개념을 소개해주며 상용화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이런 용어도 모르니? 아직도 이런 말을 쓰다니!” 식으로 들리게 만든다면, 그것은 교조주의로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태도의 문제이지요.
 
여기서 조금 다른 각도의 이야기하자면, 나는 우리가 언어 사용에 대해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고 보는 쪽이에요. 언어란 그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니까요. 언론은 언제나 대중의 눈높이를 생각해야 하고, 언어 사용은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하지요. 어떤 이가 자신에게 낯선 용어 때문에 기사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면, 혹은 내용이 중요한데도 용어에 신경 쓰느라 할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럼에도 언어 자체에 이렇게 비중을 둬야 하는 이유가 뭘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어차피 완벽한 언어도 아닌데 말이지요.
 
예를 들어 ‘장애우’라는 말은 장애인 권리를 위해 다가가자는 의미로 처음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시대적 흐름에 따라, 지금은 장애인을 특별히 ‘친구’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다지 좋은 게 아니라는 인식이 생기게 되어, 인권운동 진영에선 점차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애인 인권을 위한 활동을 하는 사람이 자신이 늘 써오던 대로 ‘장애우’라는 말을 고집한다고 해서, 그가 차별적이라거나 장애인권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는 중요하지만, 그 내용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용어를 빨리 접하는 사람들이 특정 계층이라는 점, 우리사회의 지식인 층이 늘 말만 앞서고 그 내용을 채우는 일에 있어서는 한없이 뒤처져 있다는 점을 알기에, 더욱 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다> 2011년 2월 25일에 실림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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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2. 소수자 집단의 ‘피해의식’ 어떻게 볼 것인가

일다와 함께 2011. 1. 14. 15:18
소수자 집단의 ‘피해의식’ 어떻게 볼 것인가
<조이여울의 기록> (2) 진단은 낙인이 되고, 원인은 답이 된다 
  
차별과 폭력, 사회적 소외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언론활동을 하다 보면 종종 ‘피해의식’이라는 용어를 접하게 되거나 떠올리게 된다.
 
개인차를 감안하고, 사회적 소외와 차별을 겪어 온 사람들이 그 결과로 피해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탓도 아니다.
 
문제는 피해의식이 사람들 간의 소통을 방해하고 상황을 쉽게 왜곡시킨다는 점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하여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거나, 자신과 처지가 다른 이들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등을 예로 들어보자. 이런 경우 피해의식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과 해당 주제에 관해 대화하는 건 불편한 일이 되고, 아예 ‘만남’ 자체를 꺼리게 되는 상황으로까지 갈 수도 있다.
 
때로 피해의식 혹은 그로 인한 배타성이 ‘집단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도 한다. 내가 보아온 바로는, 소수자 집단의 배타적인 성격이 그렇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인 이들에게 또 하나의 낙인이 되어 차별을 지탱해주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들여다보기 전엔 이해할 수 없는
 
작년 10월 재일조선인 선진유씨를 인터뷰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재일동포, 당신이 이야기할 시간입니다” <일다> 2010년 10월 20일) 도쿄로 떠나기 전 나는, 재일조선인 사회가 너무 “폐쇄적”이라 일본사회와 소통하며 상황을 개선해나갈 통로를 찾기 어렵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재일조선인 사회에 대한 나의 관심은 몇 년 전 내 또래인 림혜영, 조경희씨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커졌는데, 일본사회에서 재일조선인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대우를 받는지 듣고 깜짝 놀랐다. 그 정도일 줄이야. 천민집단 중에서도 천한 취급을 받아왔다면 설명이 될까?
 
한 번은 혜영씨가 지나는 말로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사람들 보라고 일부러 집을 깨끗하게 해놓는 경향이 있대요” 했다. 일본사회가 재일조선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조선 사람들은 지저분하다-을 반영한 얘기였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재일조선인의 삶은 사회의 편견과 낙인의 잣대에서 결코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코-카운셀러인 32세의 여성 선진유씨를 만나러 갔을 때, 나는 또 깜박하고 말았다.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의 삶이 어떠한지를 말이다. 나보다 좀 더 어린 세대라고 생각해서, 그새 일본사회도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었는지 모르겠다. 또는 마음수련을 해온 그녀의 맑은 표정을 보며, 공포에 시달렸던 지난 시절의 그림자를 읽어내기 어려웠던 탓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김없었다. 정리되지 않은 가해-피해의 역사, 전후에도 계속된 조선인학살, 규명되지 않은 폭력, 뿌리 깊은 인종차별,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는 불안감. 개인이 특유의 성격이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환경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진유씨는 어릴 적부터 자주 망상에 시달렸고 성인이 되어서도 조울증, 과민성대장증후군 등의 질환을 앓았다고 했다.
 
선진유씨의 고통스런 경험은 ‘개인의 문제’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 해결책도 ‘개인적인 수준’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자신을 둘러싼 사회는 문제 해결은커녕 이야기할 수 있는 여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 경험은 고스란히 개인의 몫이 되어 정신과 질환의 목록으로 나열될 뿐이었다.
 
진유씨는 학창시절 친구가 칼로 자신을 찌르는 꿈을 종종 꾸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공포에 대해 대화할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대학 사물놀이 동아리활동을 하며 무대에 올랐을 때, 관중 중에 누가 “너희는 조선인이냐?”라고 묻자 공포감에 그만 몸이 굳어버린 경험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다른 멤버들은 자기 태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일본인 친구들의 입장에서, 진유씨의 태도는 ‘피해의식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진유씨의 악몽에 대해 만약 그 친구가 알았더라면, 내가 왜 너를 죽이려 하겠냐며 불쾌감에 말도 섞기 싫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대에 오른 사물놀이패 멤버들도 대체 조선인이냐고 묻는 게 뭐가 대수라고 공연을 망치는지 답답해했을 것이다.
 
피해의식이란 이렇게 악순환 된다. 자신의 감정과 태도가 이해를 받지 못하니 더더욱 주위 사람들에 대해 신뢰를 잃게 되고, 그럴수록 사회와의 벽은 두터워지는 것이다.
 
‘비주류’라는 꼬리표를 단 사람들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개념으로 ‘결핍된’ ‘열등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의 경우에, 개인은 쉽게 ‘집단’으로 평가를 받는다. ‘비주류’라는 정체성이 꼬리표가 되어, 더 이상 개인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 꼬리표는 개인적으론 긍정적인 평가를 하려 노력한다 해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불명예스러운 이름이므로 개인의 일상에서도 크고 작은 갈등상황을 빚어낸다.
 
“미혼모”라고 불리는 집단, 혹은 “아줌마”라고 불리는 집단, 외국인노동자 집단, 가난한 나라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 동성애자 집단, 고아로 자란 사람들, 범죄자의 가족들, 특정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 고교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 천대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소수 종교를 믿는 사람들…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결핍되어 있다고 평가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꼬리표 떼기에 열중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거나, ‘나는 내가 속한 집단의 사람들과는 달라’ 이런 식으로 평가 받으려 노력하면서 말이다. 그 결과는 집단을 향한 사회적 차별에 동조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이를 테면 상당수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이름을 쓰면서, 조선인이란 걸 들킬까 전전긍긍하며 일본사람인 척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도쿄 신주쿠에 있는 한국-조선도서관 <문화센터 아리랑>의 부이사장인 송부자씨(72세, 여성)는 인터뷰에서, 자녀들이 괴롭힘 당하지 않게 하려고 매일 기모노를 입고 모피도 두른 채 학부모위원회 활동을 했었다고 회고했다. (“역사를 바로 가르칠 때 정의가 생겨난다” <일다> 2010년 7월 27일 박희정 기자)
 
또 어떤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자기 정체성의 꼬리표를 지탱하느라 힘겹다. 화살을 안으로 돌려 ‘더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해’, 혹은 ‘우린 이래서 안돼’, ‘저 사람은 우리 모두에게 망신이야’ 하고 자기 자신과 내부집단에 대해 검열과 가혹한 평가를 내리기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다수집단의 사람들은 고려조차 해보지 않았을 규정을 무수히 만들어, ‘평균에 못 미치는 존재’에게 사회가 부과하는 무게를 버텨내려 하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소외의 문제가 민족성이나 종교성과 관련이 있을 경우엔, 해당 집단의 여성들에게 부과되는 짐이 훨씬 커진다. 이 시대에 왜, 그것도 일본사회에서 공격 대상이 될 게 뻔한 상황에서 조선학교 여학생들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녀야 하는가. 소수민족들은 여자들이 관습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지 더 엄격하게 감시한다. 소수집단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여성들의 몸은 쉽게 통제 대상이 된다. 더 민족적이고 더 종교적이어야 한다.
 
흑인남성들은 흑인여성이 백인과 연애하거나 결혼하는 것에 대해 공공연히 분개한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연애에 왈가왈부할 일이 뭐 있으며 자존심 상할 이유가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밝힌 바, 실상은 흑인남성이 백인여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2배가량 높다고 한다.) 이런 시선이 있는 한, 흑인여성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의 결정에 대해 검열을 하게 마련이다. 우리 집단에 대해 ‘배신’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그런데 왜 개인이 이런 터무니없는 짐을 이고지고 가야 걸까. 왜 하루하루를 평화가 아닌 분쟁의 현장으로 삼으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다가가기 한 뼘이 아쉽다
 
나는 소수자 집단의 피해의식이나 폐쇄성, 혹은 배타성이 주제로 등장할 때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서 이 말이 떠오를 때에도 ‘한 뼘이 아쉽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 번 더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과 같이, 다가가는 한 뼘의 거리 말이다.
 
때로 어떤 이의 피해의식이 특정한 개인을 향한 원망으로 표출되어 보일지라도, 사실 그 원인은 사회적 기반과 지지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니 우리가 개인으로서 그 사람에게 잘못한 일은 없다 하더라도, 사회구성원인 개인으로서는 ‘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점에서 책임을 느낄 수는 있다는 이야기다.
 
만약 일본사회가 재일조선인 집단에 대해 “피해의식”에 절어 “폐쇄적(혹은 공격적)”이라고 평하고 있다면, 그러한 진단에 앞서 원인인 무엇인지를 확인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원인을 찾아내 교정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간편하게 진단만 내린다면, 그것은 낙인의 또 다른 양상일 뿐이다.
 
소수자 집단의 폐쇄성과 피해의식의 정도가 바로 그 집단이 속한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척도라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일본사회가 소수민족에 대해 너그럽고 관대한 문화였다면, 또 역사를 지배가 아닌 평화를 바라는 관점에서 교육했더라면 재일조선인 집단의 폐쇄적인 성격은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선진유씨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과 경험에 대해 “말할 기회”를 가져야 하고, 그것은 “절대적 안심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에서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의 인터뷰 기사 제목에 “당신이 이야기할 시간입니다” 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일본사회와 한국사회, ‘우리’가 들어야 할 시간이다. 재일조선인들의 권리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반일감정을 드러내는 것 외에, 우리와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재일조선인의 현실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이해하고 있었는가. 또 우리 사회의 소수자 집단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간혹 피해의식이나 배타성과 같은 소수자 집단 내부의 부정적인 일면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래서 안 돼, 저래서 안 돼’ 하며 상대적 우월감을 확인하는데 사용하는 대신, 그 원인이 되는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자세가 절실히 요청된다. 그 방법은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는 데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말이지, 한 번 듣게 되면 두 번 듣기는 훨씬 쉽다. 배경지식이 생겨 내 마음에 상대방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었으니까.
 
<일다> 2011년 1월 14일에 실림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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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1. 우리는 동등한 존재인가?

일다와 함께 2011. 1. 5. 14:21

경쟁사회에서 ‘평등’의 의미를 묻다
<조이여울 기록>(1) 우리는 동등한 존재인가?

외국에 나와 있으면 ‘국적’이나 ‘민족’이 나란 사람을 소개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한번은 여행객을 상대하는 상인이 “한국인이냐?” 묻더니 “빨리빨리!”라고 말하며 인사하는 보았다. 힌두인은 “나마스테” 일본인은 “곤니치와”인데, 한국인은 “안녕하세요”가 아닌 “빨리빨리”라니, 이 상인이 한국사람을 좀 아나 보다 싶었다.

남인도의 덥고 습한 날씨 탓인지, 이곳 사람들은 남녀노소 해가 쨍쨍한 낮 시간 내내 낮잠을 자거나 나무그늘 아래에서 아이들과 함께 쉰다. 상점이나 식당 문은 10시가 넘어야 열리는데, 1시부터 4시까지 휴식을 취하니 결국 일하는 시간은 오전에 잠깐, 그리고 오후 해질녘의 잠깐이다. 물론 여기서 ‘잠깐’이라는 표현은 한국사람인 나의 기준에 맞춘 것이다.

외국에서 한인 집단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열심히 일한다’를 넘어서 ‘악착같이 일한다’는 것이고, 한국사회가 ‘바쁘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이가 별로 없을 것 같다. 혹자는 한국의 노동력이 그만큼 질이 좋은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실로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행복한 삶과 비추어보았을 땐 어떠할까.

나는 외국에서 듣는 이 “빨리빨리”라는 우리말이 ‘발 동동’이라는 의미로 들려와 자조 섞인 웃음이 나왔다. 한국사회를 하나의 캐릭터로 이미지화한다면,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발 동동 구르는 모습이 떠오른다. 심지어 이것을 한국 현대사회가 에너지 동력으로 삼아온 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빠르다라는 개념에는 늘 ‘남보다’라는 혹은 ‘전보다’라는 비교가 들어가 있다. 비교 대상이 없으면 빠른 것은 없으니까. 더욱이 순위를 매기는 일이 일상적이고, 우열을 나누는 일이 자연스러운 경쟁사회일수록 그러한 종류의 ‘비교’는 그 중요도가 매우 높아진다. 뛰어나다거나 한심하다거나, 해냈다거나 실패했다거나, 성장했다거나 후퇴했다거나, 예쁘다거나 못났다거나 등등의 평가가 너무나도 자주 주어져 우리의 일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등한 인간 존엄성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이제 나는 이 문제를 내가 인생의 화두로 삼아온, 인류의 오래된 주제인 ‘평등’과 관련 지어 생각해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인도처럼 카스트 제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나면서부터 주어진다는 동등한 존엄성을 깨닫기가 결코 쉽지 않은 사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평등이라는 개념을 본질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사람들 사이에는 비교적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성향 혹은 형상과 가치들이 있다. 그 기준에 어떤 이들은 좀더 부합해 보이고 어떤 이들은 좀 덜 부합해 보인다. 선호하는 가치와 동떨어져 보이는 이들도 있다.

비교는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이를 테면 직장에서 어떤 기준도 없이 구인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보다 많은 이들이 동의할 만한, 일명 “타당한 기준”을 가지고 인사 관리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평등에 가깝다고 본다. 그럴수록 ‘능력’ 중심이라는 가치가 중요해지고, 배움이나 경험 유무 그리고 똑똑한가 순발력이 있는가 등의 요소들이 크게 작용하게 될 것이다. 건강을 비롯해 직장생활 원만히 할 성격으로 보이는지에 대한 여부까지 포함하여.

업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더 평가해주고 그에 따른 보상을 준다고 해서, 그것이 부당한 대우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성과에 대한 평가와 보상이 따르지 않을 때 불공평하다고 얘기될 것이다. 능력에 따른 평가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합법적일 뿐 아니라, 인맥 위주의 사회시스템이 앞으로 변화해나가야 할 방향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불편한 사실이 있는데, 쉽게 간과해버리는 점이기도 하니 이 기회에 굳이 꺼내어 이야기해보려 한다. 생존이 걸려 있는 이 무대가 누구에겐 쉽고 누구에겐 어렵다는 사실 말이다.

모든 것까지는 아니어도 많은 것을 잘 해내는 팔방미인이 있는가 하면, 무엇을 해도 남들보다 제대로 못해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다. 집중하여 일하기엔 건강이 따라주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학습장애가 있어 사회화가 어려운 이들에겐, 염색체나 두뇌의 문제로 타인과 소통을 못하는 사람들에겐 공평하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일까. 동등한 인간의 존엄을 느끼게 해주는 순간은 어떤 때이며, 평등이란 어떤 의미일까.

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 미성년자로서 법적 보호를 받는다는 것, 투표권을 갖는 것, 성인이 되면 술을 마실 수도 있다는 것, 또는 재활치료나 활동보조인의 사용이 허용된다는 것? 제도와 법이 보장하는 평등이란, 그것이 매우 중요하고 아직 한참 덜 채워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커 보인다. 인간은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세상에서 인정 받기를 바라고 만족을 얻길 바라며 사랑을 원하는 존재임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공적인 장에서가 아니라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성격이나 외모의 비교는 또 어떤가. 어떤 이들은 인기가 좋아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어떤 이들은 ‘비호감’이라며 타인들이 기피한다. 그것은 평등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혹은 없을까?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따뜻하고 호의적인 인간관계를 어떤 이는 비교적 쉽게 얻는 것 같고 어떤 이는 얻기가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과연 인간관계 속에서 개개인이 동등하게 인정 받는 인간 존엄성을 어떤 식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 괜찮은 세상이라면…

Canon | MP250 series | 2010:09:10 14:56:12

일다 그림작가 시로의 작품 "경쟁"

나는 이전에도 페미니즘, 소수자의 인권과 같이 ‘평등’이라는 개념과 뗄 수 없는 가치에 대해 생각할 때, 이처럼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여러 가지 형태로 되풀이 고민해보곤 했었다. 한 번은 동료인 윤정은 기자가 평화를 지향하는 외국의 한 대안공동체의 규정에 대해 들려주었는데, 이런 고민의 연장선에서 논의해볼 수 있는 예시였다.

그 공동체에서는 구성원들 간에 비판을 하는 것도 지양할 뿐 아니라, 칭찬을 하는 것 역시 좋지 않다며 자제하도록 하는 규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칭찬을 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인정을 한다는 것인데, 그건 다른 누군가에 대해선 인정하지 않거나 최소한 그보단 덜 인정한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월감이나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으로, 그러한 감정을 유발하는 것은 평화로운 공동체를 훼방하는 요소라고 보는 것이다.

아이들을 키울 때에도 과연 칭찬을 하지 않고 교육이 가능할까? 하는 현실성에 있어서의 의문이 들긴 하였으나,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동의하고 있는 내용-사람을 비교하지 말라-이 평화로운 삶에 필수 요소임을 부정하긴 어려웠다. 사실 타인을 인정한다는 것은 칭찬을 받는 이뿐 아니라 칭찬하는 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 정치적 행위이다.

모두가 똑같이 인정을 받는다면 ‘인정을 받는다’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좋은 평가든 나쁜 평가든 언제나 ‘남보다’라는 비교가 선행된다. 비교는 쉽게 우열을 낳게 되는데, 우열이라는 것은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안타깝게도 혹은 비극적으로 인간의 비교본능, 경쟁본능은 날 적부터 자리잡고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많은 사랑을 줘도 언니 혹은 동생과 비교하여 사랑을 덜 받았다고 느끼면 깊숙한 곳에 불만을 품게 되고, 풍요롭게 사는 듯 보여도 더 잘 사는 친구와 비교해 자신의 환경에 불평을 늘어놓는 아이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거기에 어른들과 사회가 더욱 합세해 비교를 조장하고, 경쟁을 앞장서서 가르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어릴 적에 나는 부모님에게 주위어른들이 “요즘은 딸 키우는 게 열 아들 안 부럽다”거나 “딸을 키우면 비행기를 타게 된다” 등의 얘기를 인사처럼 하는 걸 종종 보았다.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다. 딸만 가진 부부에게 주는 일종의 위로의 말이니까 말이다. 당시 나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고 자신했으므로, 우리 가족은 행복한데 왜 어른들은 저런 옹색한 이야기를 하는 걸까 싶었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무의식 중에선 행여 아버지가 아들이 없음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있는지 살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것은 아주 가벼운 예일 뿐이다. 옛날부터 “아비 없이 키우니 더 엄격하게” 자식을 훈육하는 어머니의 사례는 미담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엄격하게” 라는 말의 구체적인 행위로는 매를 때렸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실상 그 “더 엄격하게” 라는 것이 어떤 ‘결핍’의 상태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선 자식도, 어머니도 잘 알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내로 태어나지 못했으니 남의 집 아들 부럽지 않게 부모를 만족시켜야 한다거나, 공부를 못하니 운동을 뛰어나게 잘해야 한다거나, 입양 된 아이니까 착하게 굴어야 한다거나, 엄마가 가난한 나라에서 왔으니 보란 듯 성공해야 한다거나, 장애가 있으니 성격이라도 고와야 한다거나, 불 품 없이 생겼으니 애교를 키워야 한다거나, 독신으로 살 거면 사회적 지위가 높아야 한다거나, 동성애 커플이니까 더 낭만적인 사랑을 지속해야 한다거나 등등.

자신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괜찮은” 세상이었다면 가지고 있지 않았을 의무감, 부담감, 열등감이라는 감정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시달리고 있다. 자신이 처한 불리한 위치를 극복하며 삶의 동력으로 삼는 이들도 물론 있겠지만,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인정받지 못할 때 부자연스러움과 억압감을 내면화하게 마련이다. 그 심리적인 여파는 평생을 지배하는 것으로 심리학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비교의 중요도 낮추기, 경쟁을 지양하기

경쟁사회에서 인간이 자신과 타인이 동등하다는 것을 ‘실재로’ 알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과 누군가를 비교하며 우열을 평가하게 되는 순간, 동등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은 크게 흔들린다.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가슴 속에 인류애 대신 인간에 대한 회의와 분노를 키우게 된다.

인간 세상엔 ‘절대’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기에 비교가 필연적이고 경쟁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우리가 우열을 나누거나 등수를 매기는 시스템에서 변화를 꾀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인간의 기본권인 평등, 그리고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인간 존엄성의 회복을 위해.

이를 테면 학교에서 시험을 없애지는 않더라도 성적의 중요도를 낮출 수는 있는 것이다. 지금은 오로지 성적에만 모든 중요도가 부과되어 있지 않은가. 직장에서 학벌의 중요도를 낮추거나, 어떤 특정한 재능에만 더 가치를 높이 두지 않거나, 매스미디어가 부와 성공에 대해 크게 칭송하지 않거나, 지역사회가 다양한 개개인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주는 것, 그리고 썩어나가도 좋은 큰 파이 대신 분배에 더 신경을 쓰는 정책을 펴는 것도 당연히 효과가 클 것이다.


무엇보다 수시로 비교가 일어나는 우리의 마음에 대해 당장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랑과 인정을 먹고 자라는 어린 아이들에게 “네가 최고야”, “너는 특별해” 라고 말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 좋아, 너의 존재가 나를 기쁘게 해. 그렇지만 특별할 건 없어. 사람들의 가치는 모두 동등하니까.” 하는 자세로 대해주어야 더 교육적인 것 아닐까? 치열한 경쟁 때문에 친구도 없다는 요즘 학생들에게 “성적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너희에게 식성의 차이가 있는 것보다 더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일러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우열을 가르는 일이 너무나도 익숙한 나머지, 그것이 평등이라는 인간의 기본권을 훼손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조차 갖지 못하고 사는 게 아닐까 싶다. 분별하고 평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다시피 한 나로서도, 인간의 존엄함과 신 앞에 동등한 존재로서의 ‘우리’를 생각하며 더 넓은 마음의 창이 열리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쓴다.

<일다> 2011년 1월 4일에 실림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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