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1.12.15 예비법조인들에게 하고픈 이야기
  2. 2011.04.04 기록10. 인권운동의 '공간'을 마련하자
  3. 2011.03.11 기록9.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끝
  4. 2011.02.27 기록7.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2

예비법조인들에게 하고픈 이야기

일다와 함께 2011. 12. 15. 11:00


법조인의 ‘엘리트주의’와 법의 공정성

- 예비법조인들에게 하고픈 이야기

<사법연수원 인권법학회 학회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2011년 2월


사법연수원 인권법학회 여러분과 만난 지 어느덧 시간이 꽤 흘렀네요. 돌이켜 그 짧은 만남을 떠올려보면, 사법연수원의 독특한 분위기-사회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학교라고 하기도 뭐한-와 더불어 그 속에서 ‘배움’에 열려 있는 사람들의 눈빛이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인권법학회가 어떤 역할을 하는 곳인지 금방 알 수 있었지요.

1년간의 학회 활동을 정리하고 알리는 소식지에 자유로운 주제의 공간을 마련해주셨으니, 법조인이 아닌 사람들 중의 한 명으로서 법조인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여러분께 해보려 합니다.

나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호의를 가지게 된 법조인들이 몇 분 있습니다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법조인 집단에 대해 그리 좋은 평을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우스개로, ‘변호사 백 명이 한강에 빠지면 강은 더러워지지만 나라는 깨끗해진다’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의’ 실현과 관련 있어야 할 집단이 돈에 양심을 팔면, 그 악영향이 크다는 이야기를 풍자하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정계나 재계의 실세, 또는 지역 유지 등에 얽힌 권력비리에는 검사들이 연루되어 언급되는 경우가 계속 있어왔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검사집단에 대한 이미지는 ‘권력의 시녀’라는 오명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나는 그런 이미지와 실제 현실을 비교하면서 그 평가가 타당한지 그른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즉 주목 받는 집단으로서 법조인의 위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법조인도 직업인들이고, 직업에는 귀천이 없지요. 그러나 법조인들에 대해 우리 사회는 상당히 높은 대우를 해줍니다.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직업군에 해당하고, 사회지도층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때문에 이들 집단에 대한 풍자나 비판의 기저에는 부와 명예 혹은 권력을 ‘가진 자’를 향한 질시도 담겨있지만, 그만큼의 기대도 담겨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기본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고, 법조인의 양심이 우리 사회의 청렴도나 민주주의 성숙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람들 일반의 생각이 법조인에 대해 ‘특별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시선을 받는 위치에 놓인 법조인들의 태도와 삶은 과연 어떠할까 이 문제를 한 번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이 보내는 이 ‘특별한 시선’이라는 것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채워주는 듯 보이지만, 그런 시선에 장단 맞추다 보면 어느새 평상심을 잃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혼란스럽게 되기도 합니다. 개개인의 일상적 삶, 즉 내면과 사회적 지위나 역할, 즉 외면이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 그만큼 인간은 행복에서 멀어진다고 심리학에서는 말하지요.

이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엘리트주의를 경계했으면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는 강력한 엘리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들 내부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 엘리트주의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위험한 것이지요. 다른 집단과의 소통을 가로막고, 배움에 있어서도 닫혀있게 만들며, 세상을 좁게 사는 방식입니다. 물론 평등에도 위배되고 말이지요.

수년 전에 법정 취재를 갔다가 보았던 장면입니다. 아마도 성폭력 관련 사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날 법정에는 증언자가 여럿 있었습니다. 증언 순서가 미리 정해져 있었지요. 그런데 재판이 시작되자 갑자기 재판부가 순서를 변경했습니다. 마지막 차례였던 증인이 첫 순서로 증언을 하게 되었지요.

사람들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요. 그것은 그 증인이 대학교수라는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교수씩이나 되는 분이 법정에 출두했으니, 시간 절약하실 수 있도록 판사들이 배려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당사자인 증인을 비롯해 함께 갔던 일행과 법정을 나와서, 판사들의 엘리트주의는 정말 못 말리는 수준 같다며 그 원인 분석을 해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과연 학벌이나 사회적 신분에 따라 증언 순서를 바꾸는 재판부가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혹자는 개인의 가치관이나 태도가 법조인으로서의 역할과는 별 연관성이 없다는 듯, 객관적이고 공정한 법의 판단이 지식습득으로서 가능한 것처럼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디 실재가 그런가요? 법조인 개인의 가치관과 태도는 그의 사회적 역할 수행과도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언론인들도 마찬가지지요.

모 대학 출신자들 눈에는 해당 대학 출신자들밖에 뵈는 게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엔 신분제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사회생활을 해나가는데 있어 많은 경우 대학 인맥을 비롯해 비슷한 지위의 사람들 테두리 안에서 관계를 맺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학벌이 좋거나 학력이 높은 사람들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사람들에 대해선, 그 존재를 상상도 못했거나 그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불리한 이야기인지 유리한 이야기인지도 모른 채 변호인이나 검사의 심문에 끄달려 가는, 그러니까 “똑똑하지 못한” 사람들도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변호하지 못하는 사람들, 법정에서 그런 사람을 보면 그가 원고든 피고든 간에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사실 스스로를 변호할 줄 아는 사람들, 혹은 비싼 돈을 들여 승소율 높은 변호인을 고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 역시 기자생활을 하면서 보다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들, 사회를 통찰하는 눈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말과 글로 잘 풀어내는 사람들을 선호하게 됩니다. 또,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법정에서 똑 소리 나게 발언하는 당사자들이나, 용감하게 자신의 문제를 사회 이슈로 만들어 변화를 촉구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손을 잡고 춤이라도 추고 싶어지지요.

반면 그 반대의 경우는 선호하지 않게 되지요. 말 잘해주는 취재원이 필요하지, 설사 내용이 있다 하더라도 설명을 잘 못하거나, 간혹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길 하거나, 말 실수를 하는 사람에게는 신뢰를 보내기가 어렵지요. 우리는 직업상 말과 글이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의 긴 생애 중에서 잠깐 만나고 말뿐이니까요.

그러나 똑똑하지 못하고 의사소통이 어렵고 실수도 많은 바로 그 사람들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고, 사회적으로 관심을 더 받아야 할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법의 공정성, 언론의 공정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법조인과 언론인들이 자신의 눈높이를 조정하고 맞추어갈 (배워갈) 적극적인 태도를 지녀야 하는 것이겠지요.

이를 테면, 사람들이 별 것도 아닌 일로 소송을 벌이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판사들에겐 충분히 있을 수 있으나, 개개인의 일상을 전쟁과도 같은 상태로 몰고 가는 ‘소송’이란 것이 당사자들에겐 별 일이 아닐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검사를 만나고 온 이들은 ‘검사들 목 부러지겠다’ 이러지요. 거만한 태도로 사람을 내려다본다는 뜻입니다. 심문을 하는 검사의 역할상 기 싸움에 능해야 할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몸에 익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건과 성과만 보일 뿐이지요. 언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종에 목 매며 경쟁매체에 신경 쓰다 보면, 정작 중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물론 나는 법조인들 중에서 특히 ‘인권’을 생각하는 이들이 얼마나 관대하고 통합적인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엘리트주의 사회에서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들이 엘리트의식에서 스스로 해방되기란, 별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업무 스트레스가 많더라도, 법이 누구를 위해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잊지 않고 누구에게 공정하지 않은지, 누구에게 다가가지 못하는지, 나의 역할은 무엇일지 언제나 생각해주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앞으로도 늘 새로운 배움에 열려있어서, 삶을 배우고 세상을 배우는 일이 여러분의 평생의 과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조이여울
/ 저널리스트, 미디어 <일다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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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10. 인권운동의 '공간'을 마련하자

일다와 함께 2011. 4. 4. 09:05


인권운동의 ‘공간’을 마련하자

<조이여울의 記錄> (10) <인권센터> 건립 위한 주춧돌을 함께 놓으며

♦ 
인권의식이란, 사회구조에 안주하지 않는 것

 
유엔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이었던 장 지글러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에서 ‘식량의 분배’ 문제를 다룬 바 있다.
 
인류는 이미 120억 인구를 먹일 식량을 생산할 능력이 있음에도, 지구상엔 굶주리는 사람들이 무려 10억에 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식량이 차고 넘쳐 버리는 사람들과, 굶주림에 방치된 채 죽어가는 아이들이 공존하는 지구촌. 이것이 인류가 고안해 낸 정치, 경제시스템이다. 사람의 생명보다도, 기득권층의 권력 유지와 거대식량자본의 이윤 획득이 더 중요한 사회인 것이다.
 
여기서 만약 한쪽에서 버려지는 식량으로 다른 쪽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일단 먹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이 바로 ‘인권의식’이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 바로 이 생각이 ‘가난한 나라에 태어났으니까 어쩔 수 없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원래 기업의 속성 아닌가’ 하며 현재의 불평등한 사회시스템을 정당화하거나 관망하려는 욕구를 앞설 때, 비로소 인류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  인권운동을 지원하는 재단 ‘사람’

▲ 인권센터 건립을 위한 주춧돌 쌓기 http://hrfund.or.kr
 
최근 ‘인권재단 사람’에서 인권운동의 장이 될 <인권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주춧돌을 쌓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인권의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불공평한 사회구조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인권운동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서도.
 
‘인권재단 사람’(이하 ‘사람’)은 국가와 대기업의 지원을 받지 않고 민간자금을 조달하여 만든 재단으로, 인권단체와 활동가들 그리고 인권활동을 지원해왔다.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은 재단을 꾸려가기엔 상당히 적은 액수지만, 정부와 기업의 간섭과 검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사람’은 먼저 재정발전소를 통해, 열악한 재정규모를 가진 인권단체들이 후원회원을 보다 쉽게 모을 수 있도록 CMS(자동이체) 업무를 대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후원인 모집을 위해 별도의 인력이나 예산을 배치할 수 없는 작은 규모의 인권단체들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절실한 요구는 없었을 것이다.
 
이 제도를 활용하고 있는 단체들은 국가폭력을 고발하고 피해자를 지원하는 모임, 빈곤 문제에 대응하는 단체, 평화운동단체, 청소년, 시설장애인, 동성애자, 외국인노동자, 노숙인 등 소외된 이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모임 등 52개 조직들이다.
 
대안매체를 만들고 여성주의 저널리즘을 실천해온 <일다>의 활동 역시, ‘인권재단 사람’ 의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계속될 수 있었을지 미지수다.
 
♦  ‘공간’의 분배
 
지금, 인권재단 사람은 재정발전소에 이어 ‘공간’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인권단체들에게 사무실, 상담실, 교육장, 회의실, 공연장 등을 제공하기 위한 <인권센터>를 100평 규모로 장기 임대하기 위해, 올해 10억을 모금한다는 계획이다.
 
인권단체들은 아직 안정적인 사무 공간을 마련하지 못한 곳들이 많다. 있다 해도 활동가 몇 명이 모이면 꽉 차는 집무실 규모이다. 회원들과 만날 공간이나 토론회, 공개모임을 열 마땅한 장소가 없어 활동에 큰 제약이 따른다.
 
<일다>에서도 독자들과 만남을 가지려면 장소가 늘 문제가 되었다. 상시적인 교육장이나 회의실이 있었더라면 곧바로 준비단계로 옮겨갔을 행사들이, 논의되다 기획단계에서 그치고 만 적도 많다.
 
그러니 시청 군청 등의 관공서와 각종 지방자치단체 관할 건물들에 비워둔 채 있는 공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무슨무슨 회’ 이름의 옛날 활동했던 조직들이 지금은 간판만 붙이고 굳게 문이 잠긴 채 장소만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행정시스템의 완고함에 고개를 내젓게 된다.
 
이처럼 공간이 아쉬웠던 지라, ‘사람’의 <인권센터> 만들기 모금운동 소식을 접했을 때 그것이 인권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힘일 되어줄 수 있는 프로젝트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나아가 인권재단 사람은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고, 동성애자가 위협을 느끼지 않고 모일 수 있는 공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는 공간, 국가폭력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해줄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인권센터>의 운영 원칙과 방식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사람과 사람의 뜻이 모이는 과정이 곧 열쇠를 만드는 길이 될 거라고 믿는다. <인권센터>를 건립하기 위한 ‘주춧돌’을 함께 놓으며, 더불어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주제와 형태로 인권운동을 하는 모임들이 생겨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열려라! 인권센터 (주춧돌 참여하기) http://hrfund.or.kr

<일다> 2011년 4월 4일에 실림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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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9.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끝

일다와 함께 2011. 3. 11. 16:05
여성주의 저널리스트로 살아가는 동력
<조이여울의 記錄>(9)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4 

세상이라는 큰 벽에 부딪힐 때

 
여러분은 편지에서, 여성주의자로 언론활동을 하는 것의 ‘무력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무력감 뒤에는, 지금까지 활동해온 내용과 시간에 대한 당혹감이 뒤따른다는 것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요.
 
최근에 나는,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인적으로 통장 잔고도 없고, 10년 전에 비해 기력도 한참 딸리는 데다가, 발돋움할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요. 반면 세상은 쳇바퀴 돌고 있고, 실제 인류의 역사가 그러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더욱 부각되어 다가왔습니다. 21세기에도 전쟁이 계속되고, 돈이 정치를 하게 되고, 사회적 불평등은 더 커져가는 상황이 좀처럼 나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바보들의 대행진을 했나? 하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그것이 바로 무력감이겠지요.
 
여러분도 이미 느끼고 있듯이, 세상은 정말 그 흐름을 바꾸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요. 우리는 현실을 인식해야만 하니, 자신의 노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식의 사회운동권 특유의 착각상태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상황 속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되더군요. 어쩌면 내가 너무 큰 욕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닐까? 하고요.
 
몇 달 전 서울에 있는 한 대학건물 안에서 잘 알고 지내던 취재원을 만났습니다. 미리 약속장소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대학이란 공간이 퍽 낯설더군요. 마치 어떤 큰 회사건물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학생들의 모습도 꼭 회사 인턴사원들 같아 보이고 말이지요. ‘정말 각박하구나, 세상 심란해졌다’ 싶었죠. 그리고 이런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일다>를 꾸려가고 있는 나는, 사회에서 보면 “우물 안 개구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물론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니지요. 우물 밖 사회를 조망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일다>가 작은 우물일 뿐이라는 생각은 틀리지 않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다음 이야기입니다. 회사 같은 분위기의 대학건물에서 만난 취재원과의 대화는, 그렇기 때문에 더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일다>는 사회라는 넓은 공간에서 작은 하나의 우물일 뿐이고, 그런데 바로 그 우물이 무척 소중하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내가 저널리스트로 살아오면서 보람을 느낄 때가 언제냐고 물었지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보람을 느낄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일다> 독자위원회가 결성된 것도 그 한 가지 예입니다. 대체 어디서 이런 사람들이 튀어나왔을까 싶더군요. 대부분 20대~30대 사회 생활을 하는 여성들인데, 정말 다양한 위치에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독자위원들은 <일다>가 소중하다고 평해주고, 매달 정성스럽게 모니터링을 해줬습니다. 이것이 <일다>의 힘이구나 싶었지요. 독자들과의 만남은 기자에겐 정말 큰 힘이 됩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세상에 가려진 채 방어적으로 매체를 대해야 했던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이 <일다>의 기자들과 만날 땐 안심하고 편안하게 대한다는 점도 기쁜 일입니다. 그런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공감하고 배우고 참여하는 기자에게 주어진 특권이라 할 수 있지요.
 
사실 예전에 나는 에너지를 쏟아 부어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쓸 때, 사회에 뭔가 공헌을 하는 듯한 기분이었던 것 같아요. 글을 쓰는 것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일이라 생각했고, 실제 그렇기도 하지요. 그러나 나는 이제야 비로소, 독자들의 존재가 있기에 나의 글도 있고 내 역할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언제나 독자들이 내게 발언권을 주었고,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도 주었구나 하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지면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함께 고민하고, 배우고, 지켜봐 주고, 성장하는 일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연대에 대하여

석순의 편지에서 ‘연대’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답하는 것으로, 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해요. 함께 하자는 말은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얘기, 하지만 여성주의자의 ‘다름’을 인정하는 작업에서는 스스로 인색했던 것 같다는 얘기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소외되어있거나 취약하다고 생각될 때 더욱 그러하지요. 손 잡을 이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인색해집니다.

 
나는 좀 우스개 소리로 ‘뜻을 모으기는 쉬워도 성격을 맞추기는 어렵더라’는 말을 할 때가 있어요. 이 말은 또, 지금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환경이 다르다’는 얘기로 치환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인생이 있고, 때문에 가야 할 길도 다를 거예요. 사람이 변한다고 느껴질 때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삶은 변화하게 마련이고, 그 변화를 두려워하고 미리 제약할 필요는 없지요. 언젠가 또 옆에서 볼 것입니다. 다른 위치에서 말이지요.
 
나는 석순과 같은 매체를 볼 때에도, 그 매체의 내용뿐 아니라 매체를 만들어가는 구성원들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전과는 달라진 점인데요.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씨앗’으로 보이는 것이지요. 어디에서 싹을 틔우든 그것이 언론인으로서든 여성운동가로서든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상관 없습니다. 사람이 소중합니다. 그것은 나의 선배들이 나에게 보내준 시선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네가 어디에서 있건, 꼭 <일다>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디에서건 그 빛을 발하고 있을 테니까’ 라고 말해주었지요. 예전엔 미처 그 말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것은 어딜 가나 훌륭한 활동을 해야 한다거나, 내가 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부각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에요.
 
우리의 인생은 계속됩니다. 인권도, 평등도, 삶의 연속선 상에서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개개인의 삶이 중요합니다. 누구와 일하며, 어떤 이들과 교류하고 살 것인가의 문제에서 ‘연대’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통장 잔고보다 친구들이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수긍하는 사실이고, 뜻을 함께할 수 있는 동료 한 명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지요. 그러나 영원히 같이 하자고 맹세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디에 있든 우리는 연결되어 있고, 다시 만날 수도, 다시 함께 할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친구들도 계속 만나게 되고 말이지요.
 
나는 여성주의가 여성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내가 찾고자 한 여성주의는 언제나 ‘자유’와 관련한 것이었으니까요. 어떤 삶의 모범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아, 그런데 저렇게 살아도 괜찮아’ 이런 식으로 여성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넓혀주고, 그럼으로써 확장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조각보 이미지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평화롭게 연결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보면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모습이 됩니다.
 
지난 시절 함께 여성운동을 했던 동료들, 10년도 더 지난 지금 상황에서 여전히 함께 일하는 이도 있고, 취재원으로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일도 있지만, <일다>의 독자로만 있어주어도 고맙고 즐겁습니다. 지켜봐 주니 고맙다, 옆에 있어주니 힘이 된다, 다시 만날 수 있어 반갑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도 <일다>의 저널리즘을 알리고 교육하는 일을 해나가려 해요. 그리고 나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대학매체를 꾸려나가는 여러분들과 지금 이렇게 편지를 나누는 인연이 소중하다는 것과, 우리 사이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연대의 끈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이만 긴 편지를 마무리할게요. 우린 또 만나게 될 거예요. (끝)

<일다> 2011년 3월 10일에 실림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650

* 이전 글 보기>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서 온 편지 

* 석순에 보낸 편지(1) 여성주의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
* 석순에 보낸 편지(2) 여성과 소외된 이들에게 발언권을
* 석순에 보낸 편지(3) 언론의 영향력에는 양면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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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7.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2

일다와 함께 2011. 2. 27. 14:23
여성과 소외된 이들에게 발언권을
<조이여울의 記錄>(7)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2 
 
[올해 초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 편집위원회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여성주의자로서 언론활동을 한다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청탁서였는데, 그 안에는 현재 대학에서 여성주의 매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진솔하고도 소중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나는 흔쾌히 지난 10년 간 저널리스트로 살아오며 ‘여성주의 저널리즘’에 대한 생각하고 실천한 내용과,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들을 정성껏 담아 회신했다. <석순> 측의 동의를 구해, 우리가 서로 나눈 편지의 내용을 재탈고의 과정을 거쳐 <일다> 독자들과 공유한다. 먼저 석순이 보내온 편지를 개재하고, 이어 나의 답신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공적인 장 마련하기
 
언론의 객관성과 공정성에 관한 ‘여성주의 저널리즘’의 태동과 역할에 대해 앞서 이야기했지요. 그럼 이어서 여성주의 저널의 특성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여성주의 매체는 여성들과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게 공적인 장을 마련해주고, 공감의 힘을 바탕으로 위로와 지지를 보냅니다. 한편으로 그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적인 차별과 억압을 드러내어 변화를 촉구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성주의 저널이 비단 여성들만의 이야기를 담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사회적으로 조명이 필요한 인권 사안을 다룰 때, ‘성별을 따지지 않는 것’이 또한 여성주의입니다. 여성들이 공적인 장에서 목소리가 약하기 때문에, 안심하고 크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펼쳐 제공해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에요. (사적인 대화는 어쩌면 남성들에게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일다>를 통해 다양한 필자를 발굴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여러분이 편지를 통해 이야기한 대로, 여성주의 저널에서는 특히 당사자들의 경험이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다른 곳에선 들어주지도 않고 쉽게 왜곡했던 이야기들을 존중하지요. 그 동안 차별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터놓고 얘기할 곳이 없었던 여성들에게 말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고 공감함으로써 지지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공감의 힘은 결코 작지 않다고 생각해요.
 
나아가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서 연애로 미화되기 쉬운 ‘스토킹’에 대해서, 피해경험자가 직접 얘기하면 설득력이 있지요. 동거가 이슈화되었을 때도, 동거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얘기해버리면 그게 호들갑 떨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지요. 낙태 논쟁에서도, 인공임신중절의 경험이 무엇인지 담담히 기술한 글을 접하게 되면 살인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무색해질 때도 있습니다.
 
전문성 부여하기
 
여성주의 저널은 ‘전문가 집단’의 전문성에 대해 의문을 던져보기도 하고, 여성들 혹은 소수자들이 전문가로서 발언할 수 있도록 발언권을 줍니다. 자신이 직접 겪고 체득한 문제에 대해 사회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꼭 어떤 직위나 학위 또는 자격증이 필요한 것은 아닐 테지요. 그럼에도 한국사회에선 많은 사안에 있어서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되어야 할 ‘당사자의 목소리’가 묻혀버리곤 하는 아이러니를 많이 접하게 됩니다.
 
물론 전문가 집단이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한국사회에서 너무 과대평가 되어있다는 점에 대해서, 그리고 그 전문가 집단의 경험이 여성과 소수자의 경험과 동떨어져 있어서 해당분야에 대해 오히려 시야가 좁을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지요.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또 당사자가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그것을 이야기해줄 사람들도 필요합니다.
 
여성주의 저널은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요. 평등하지 않은 사회이니까요. 그런데 그 비판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가부장적인 제도나 시스템에 대해 날카롭게 날을 세울 때도 있지만, 언제나 그 바탕에는 다른 대안은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실행가능한지에 대한 정보를 놓치지 않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바탕이 없을 때 비판은 소모적이 되기 쉽지요.
 
나는 제도적 불평등이나 차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글이 여성들보다 남성들에게 더 환영 받는 모습을 종종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비판에는 언제나 일정 정도의 선정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물론 대부분의 기사는 독자들의 눈을 잡아 끌기 위해 선정성을 조금씩은 내포하고 있지요. 하지만 나의 경험상, 매체의 보도가 선정적인 만큼 그 내용은 허망해집니다. 과연 이것이 내가 바랐던 반응인가? 회의가 들 때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좀더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언론의 비판 기능은 생명력이지만, 대안을 만들어가는 현장을 직접 보여주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고 말입니다.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제시할 때, 우리의 지향은 훨씬 더 설득력을 얻습니다. 그것이 비판의 대상들까지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 말이지요.
 
새로운 언어 만들기
 
편지 내용에서 ‘언어 사용’과 관련하여 여러분이 고민하고 있는 내용, 특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것 같아서 말이지요.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지 않은 내용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짧게 설명하기가 어렵지요. 동성애, 성 정체성, 호모포비아와 같은 ‘성적 소수자’ 관련 기사의 예를 들어보지요. 사실 ‘소수자’나 ‘정체성’이라는 말도 쉬운 개념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적 소수자’ 또는 ‘성 정체성’이라니, 기본적인 기사의 카테고리조차 배경설명이 필요한 어려운 언어입니다. 동성애자의 인권에 평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야 쉽게 파악할 수 있겠지만, 정보를 별로 갖지 않은 다수의 독자들에겐 당최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고민하며, 초기에는 ‘성적 소수자 관련 용어 설명’ 기사를 별도로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꾸준히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또 하고, 그러면서 독자들이 관심만 갖고 본다면 이 개념에 익숙해질 수 있기를 바랐지요.
 
<일다>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재일조선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재일조선인, 그들이 누구인지 그 존재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사실상 재일조선인의 존재와 그들의 현재 모습을 알려면, 우리 역사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게 쉬운 작업이 아니지요. 그렇다고 배경설명을 건너뛰고 재일조선인 관련 사안을 다루면, 읽는 사람 마음대로 내용이 각색되어버립니다. 짤막한 보도로 접근할 수 있는 내용은 한계가 너무 컸습니다.
 
그래서 <일다>에서는 재일조선인 당사자들이 직접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글(특별기획-“재일조선인 여성 림혜영, 조경희로부터 듣다” 2008년 3월-7월)을 10회 이상 연재했는데요. 독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았다면, 아마 많은 것을 배우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겁니다. ‘관심’이라는 그 자발성까지 언론에서 책임을 질 수는 없는 일이지만, 최대한 독자들 눈높이에 맞춰 호소력 있게 다가가려고 노력을 기울이는 몫은 우리에게 있다 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새로운 언어 만들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장애인을 비하하는 느낌을 담고 있는 “병신”이라는 말은 가급적 쓰지 말기로 하고, 젊은 여성들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도 이제 좀 자제하고, “편부”나 “편모”라는 부정적인 어감의 용어 대신 “한부모”로, “미혼”보다는 “비혼”이라고, “폐경” 대신 “완경”이라고 용어를 바꿔 쓰기로 하자는 등의 흐름이 계속되어 왔지요.
 
마땅한 언어가 없던 상황에서 적절한 용어를 새로 만들고, 특히 부정적인 용어를 조금 더 긍정적인 용어로 바꿔 사용하고 퍼뜨리는 작업은 언제나 환영할 만합니다. 언론은 이를 더 확장해주는 역할을 해야겠지요. 매체는 당연히 교육의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교조주의라고 할 수 없지요. 우리는 평생 배워가는 존재이고, 자신이 아는 것만 재확인하려고 언론을 활용하는 게 아니니까요. 언론은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개념을 소개해주며 상용화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이런 용어도 모르니? 아직도 이런 말을 쓰다니!” 식으로 들리게 만든다면, 그것은 교조주의로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태도의 문제이지요.
 
여기서 조금 다른 각도의 이야기하자면, 나는 우리가 언어 사용에 대해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고 보는 쪽이에요. 언어란 그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니까요. 언론은 언제나 대중의 눈높이를 생각해야 하고, 언어 사용은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하지요. 어떤 이가 자신에게 낯선 용어 때문에 기사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면, 혹은 내용이 중요한데도 용어에 신경 쓰느라 할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럼에도 언어 자체에 이렇게 비중을 둬야 하는 이유가 뭘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어차피 완벽한 언어도 아닌데 말이지요.
 
예를 들어 ‘장애우’라는 말은 장애인 권리를 위해 다가가자는 의미로 처음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시대적 흐름에 따라, 지금은 장애인을 특별히 ‘친구’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다지 좋은 게 아니라는 인식이 생기게 되어, 인권운동 진영에선 점차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애인 인권을 위한 활동을 하는 사람이 자신이 늘 써오던 대로 ‘장애우’라는 말을 고집한다고 해서, 그가 차별적이라거나 장애인권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는 중요하지만, 그 내용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용어를 빨리 접하는 사람들이 특정 계층이라는 점, 우리사회의 지식인 층이 늘 말만 앞서고 그 내용을 채우는 일에 있어서는 한없이 뒤처져 있다는 점을 알기에, 더욱 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다> 2011년 2월 25일에 실림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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