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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은 더 주체적이 되었나

일다와 함께 2008. 5. 9. 00:04
여성들은 더 주체적이 되었나
[5주년 특별기획] 여성주의 시대진단①
 
 
10년 전, 20년 전과 비교했을 때 한국사회의 성차별 구조와 통념은 상당히 감소했다고 볼 수 있다. 여성들은 권리의식을 키우며 당당하고 공평하게 살아가길 원했고, 호주제를 비롯한 가부장제의 잔재들을 없애거나 시정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일상적인 차별에도 저항했다. 여성의 사회참여의식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분명 사회 현상적으로는 변화나 뚜렷이 나타나는 흐름들이 관찰되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 개개인의 삶은 어떠한가, 여성들은 이전보다 더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여성들은 스스로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여성들이 보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변했다고 생각할까. <일다>에서 ‘여성주의 시대진단’을 기획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다. 물론 여성들은 이전의 남존여비 사회와 비교했을 때, 보다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해야 정답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렇지 못한 현상들도 보인다.
 
성형 요구하는 사회, 명품 요구하는 사회
 
“20대 남녀의 사랑과 섹스에 대한 생각을 보면, 여자들이 확실히 주도적이 되었구나 하는 걸 느껴요.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섹스에 대해서도 예전에는 남자들이 원하기 때문에 준다는 식으로 끌려 다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젠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즐긴다는 거죠.”
 
대학에서 ‘성과 인간관계’ 수업을 하고 있는 배정원(연세성건강센터 소장)씨는 젊은 여성들의 성에 대한 가치관과 태도가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고 평한다. 성에 대해 금기시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성행위를 할 때에도 보다 주체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곧 배정원씨는 여성들이 “도구화되고 있고, 자존감을 갖기 어렵다”는 상반된 이야기를 했다. 그 이유는 ‘명품으로 치장한 미모의 모델’을 내세우는 매스미디어들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성형수술을 하고 명품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은 없고, 물건에 기대고 외모에 기대는 것은 자아존중감의 문제가 있는 거죠.”
 
외모지상주의에 물신주의가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현상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매체가 주는 이미지 모델이 턱도 없이 기가 막힌 거라서, 그런데 너무 이른 시기에 자연스럽게 주입시키다 보니 (개개인이) 그러한 기준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내공을 쌓기란 어려운 일이죠.”
 
특히 사회에 성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성적인 주체성이나 평등과는 거리가 먼 현상이다. 배정원씨는 성의식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남자들은 여전히 성 구매 행위를 하고 있고, 자신이 원하는 소비를 하기 위해 어린 여성들이 몸을 상품으로 내놓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성 산업으로 빠져드는 십대들을 보면, 우리 사회가 조직적으로 (성 산업에) 걸려들게 하는 위험요소가 많은데 경험이 부족해서 그게 어떤 건지 잘 모르는 거예요. 한 번 발을 들여놓았다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는 거죠.”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인가?
 
임상심리사 최현정(주디스 허먼 저 <트라우마> 역자)씨도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자아존중감을 갖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한다.
 
자아존중감이란 무엇일까. “스스로를 생각했을 때 내가 가치가 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어떤 실패 경험이 있어도 나는 이러한 사람이야, 하고 자기 자신을 돌보거나 추스르는 것이죠.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개념이 다양한 부분으로 나뉘어 있어서, 한쪽 측면에서 타격을 받더라도 다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자기 가치를 유지하죠. 그것이 자아존중감이 있는 것입니다.”
 
최현정씨는 사람의 다양한 측면 중에서 “한쪽의 특정영역을 강조하게 되면” 자아존중감이 무너질 수 있다고 말한다. 여성의 정체성을 사회가 다양하게 정의해주고 다양한 모습들을 인정해주어야 하는데, “외모와 같이 눈에 보이는 가치만 부각시키니까, 개인들은 자기 가치를 지키기가 어려워 진다”는 설명이다.
 
남녀 불문하고 “갈수록 완벽한 상을 추구”하는 사회가 갖는 해악성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사람은 모두 열등하거나 잘난 면이 있잖아요. 기쁜 감정이 있으면, 슬픈 감정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운 사람도 있고. 그런데 자기 단점은 다 숨기려 하고 오로지 잘난 모습만 보이려는 거예요. 감추고 피할수록 더 악화되거든요. 사회가 전반적으로 자연스럽지가 않고 인위적인 모습이죠.”
 
특히 ‘여자는 어떠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요구가 커질수록 여성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 받지 못하고 스스로도 자아존중감을 갖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이전보다 오히려 스테레오타입이 더 추가가 되고 있죠. 예쁘고, 착하고, 애도 잘 키우는 수퍼우먼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현모양처가 꿈이 아니었는데…
 
초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딸을 키우는 함수연(교육문제 관련 자유기고가)씨는 최근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교육정책에 분노하며 모두가 괴로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아이를 사교육 시장에 맡겨야 하는 건지, 해왔던 대로 살아도 괜찮은 건지 하루에도 수십 번 갈등을 겪고 있다 했다.
 
남편의 지위와 아이의 성적에 자신을 대입시키며 대리만족을 하던 여성들의 모습에서 지금 현재는 얼마나 더 나아져가고 있는지,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함수연씨는 “엄마들에게는 자기 생활이 없다”고 말한다.
 
“옛날 부모들은 제때 먹이고 입히는 게 과제였는데, 지금은 완벽하게 키우려고 몰아치는 거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뭔가 뒤쳐지는 느낌을 받고, 뒤쳐지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아요. 자기 아이가 평균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버드 보내라는 양육서가 판 치는 세상에서 과연 그 ‘평균’이라는 게 어떤 것이겠어요?”
 
함수연씨는 여성들이 결코 행복하지 않은, 공포스러운 사회적 분위기 속에 떠밀리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러한 분위기에 일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때만 해도 현모양처 되겠다는 사람 한 명도 없었어요. 그런데 사회에 나가보니 성차별도 경험하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되지 않았잖아요. 결과적으로는 현모양처가 될 수밖에 없는 거죠. 그것에 대한 좌절감이 있어서, 애한테 투영하고 집착하는 것 같아요.”
 
자식의 과제를 대신해 줄뿐 아니라 다 큰 아이 입에 밥을 떠먹여주고, 아이들끼리 놀다가 다툼이 있으면 끼어들어서 대신 싸우고, 자식의 인생이 곧 자기의 인생이라고 여기는 어머니들이 적지 않다고 우려했다. 게다가 요즘 세상은 너무 무서워져서 “아이를 혼자 둘 수 없으니까, 엄마가 더 붙어 다니게 된다”고 한다.
 
“요즘은 집안에만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전업주부라 해도 아르바이트 하나씩 하구요. 하지만 기혼여성들의 주된 관심사는 집값과 아이들 교육이에요. 이번 선거결과를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자기 아이, 자기 가족, 우리의 재산증식밖에는 없는 것 같아요. 너무 여유가 없는 삶이죠.”
 
‘가족해체론’ 급부상 이면에 가족주의 더욱 강화돼
 
겉잡을 수 없는 사교육 열풍에 대해, 여성학자 조주은(<현대 가족 이야기>의 저자)씨는 ‘무한경쟁 시대 가족의 생존전략’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제 가족들이 자신들이 일하지 않는 노년의 삶을 개별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사람들이 오래 사니까, 자식들한테 물려줄 금융자산이 별로 없잖아요. 그러니까 젊었을 때 한 푼이라도 돈을 벌 때 아이의 사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결국 가족에 대한 생존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한국사회는 최근 이혼가정, 미혼모 가정, 결혼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고 사는 사람들, 동성애자 공동체, 경제공동체 등 다양한 가족담론이 급부상했다. 가부장제에 반대하고 다양성을 존중하고자 하는 여성주의 진영에서도 한국의 뿌리깊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가족주의를 벗어나 다른 인간관계를 꿈꾸는 시도들은 중요하게 다뤄져 왔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 ‘정상가족’을 중심으로 한 가족주의는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가족해체를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정상가정’들이 있잖아요. 그들의 연대가 더욱 공고해진다고 할까요. 자녀교육을 중심으로 뭉치고 있어요.”
 
경쟁을 부추기면서 구성원들에게 안전 망을 구축해주지 않는 사회가 큰 몫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무한경쟁 사회로 접어들면서 평생직장 개념도 깨지고, 사회의 공적 서비스가 점점 더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그러니 상류층이 아니고는 여성들이 현재가 없고 미래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데, 자신의 미래는 보이지 않고 결국 자식을 통해 비전을 보려 한다는 거죠.”
 
자신을 알고 삶을 꿈꾸기 이전에 요구 받는 것
 
‘평등’이라는 개념이 법과 제도에 반영되어가고 ‘여성주의’가 사회에 일정 정도는 영향력을 가지게 된 지금의 시대,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의 시대를 다른 무엇보다 ‘돈’이 상징이 된 시대라고 말한다. 이 시대에서 여성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몇 가지 현상들을 토대로 점검해보았다.
 
여성들은 여전히 사회로부터 특정한 모습과 특정한 삶의 형태를 강요 받고 있다. 가녀린 몸매와 볼륨 있는 가슴, 큰 키와 작은 얼굴, 투명하고 어려 보이는 피부 등 외적으로 요구되는 기준은 보다 구체적이고 까다로워졌다. 살이 찌면 안 되고, 코가 낮아선 안 되며, 나이가 들어서도 안 되는 기이한 수준이다.
 
무한경쟁에 내몰렸지만 결코 공정하지 않은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은 당당하게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커리어 우먼’이면서 좋은 여자친구, 기특한 며느리, 무엇보다 자식 잘 키우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기대 받고 있다. 그러니 여성들은 만족보다는 좌절을 더 많이 맛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어떤 부분에 대해 자신감을 갖기보다는 사회적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는 열등감을 더 많이 갖게 된다.
 
이 시대, 과연 여성들은 자신의 의지로 자신에게 맞는 삶을 선택하고 만들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자기존엄성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지금 여성들의 삶은 주체적인가.
 
여성주의가 여성들의 삶, 나아가 모든 사회구성원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지금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고 과연 우리가 원하는 삶은 무엇이었나를 다시금 상기시켜보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앞으로 우리 사회와 여성 개개인들, 그리고 여성운동이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찾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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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1 [11:04]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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