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3.10.03 나는 뜨겁게 보고 차갑게 쓴다
  2. 2011.08.01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1만인 건립위원이 되어주세요.
  3. 2011.03.09 故 장자연씨의 죽음 앞에서- 2009년 3월 일다 시론
  4. 2011.02.05 기록 4. 피해를 말할 수 있는 사회인가?
  5. 2010.10.22 최현정의 <조용한 마음의 혁명> 구입할 수 있는 곳
  6. 2009.03.18 故 장자연씨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2)
  7. 2009.01.17 ‘부부강간’ 최초 인정한 판결이 갖는 의미 (12)

나는 뜨겁게 보고 차갑게 쓴다

자유 게시판 2013. 10. 3. 17:49

 

『나는 뜨겁게 보고 차갑게 쓴다』

-세상과 사람과 미디어에 관한 조이여울의 기록 

291쪽/ 판형 170*224 /값 15,000원
 

여성 저널리스트가 뜨거운 시선으로 발굴한 한국사회 

“이 책은 ‘여성’의 문제에서 출발하지만 노동, 동물, 환경, 농업, 생명윤리, 평화 등의 주제들과 끊임없이 교차시킴으로써, 여성주의의 전통적 쟁점들이 ‘인간’의 보편적 가치들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복잡한 이론을 동원하거나 사실을 나열하는 대신, 때로는 저자의 맛깔스러운 이야기로, 때로는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인터뷰이의 입을 통해 문제의 핵심을 드러내 보여주고,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이 책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한국 사회 의제를 어려운 이론을 빌리지 않고 “인간의 긍정적인 힘”이나 “용기”, “믿음”과 같은 가치들과 결부시켜 설명해간다. 이 책이 재미있는 대목은 이 부분이다. 기존의 언론에서 사회 문제를 읽어내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제3의 시선’으로 사회를 읽어내며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현장과 사람들의 생생한 인터뷰에서 저자가 주요하게 포착하는 인간의 내면적 가치를 끌어올린다. 

“기억 저편에 은폐된 사실과 묻힌 역사를 발굴하여 진실을 수면 위로 드러내고 생생한 현장을 복원해내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 저널리스트로서 그 역할을 해나간다는 것이, 그 과정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통찰력과 가슴 설레는 영감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이, 내게는 무척 큰 기쁨이고 영광이다.” (p.189) 

저자의 이 말은 <3장 발굴>의 발문에 수록된 글이다. 한국 사람들이라면 다 알만한 ‘3.1운동’이나 ‘제주도 해녀’, ‘황우석 사태’를 주제로 삼으며 “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라고 말한다.

그는 역사적 사건들에서 그 사건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진실이 어떻게 숨겨지고, 은폐되어 있는지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그리고 과거의 사건들을 현재와 연결시켜 그 사건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계속 영향을 주는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차근차근 설명해나간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에는 해결의 열쇠가 있다”고 힘주어 주장한다.  

저자의 뜨거운 시선을 좇아가다 보면 노동, 사형제, 성매매, 환경, 소수자 인권, 평화 등 쉽게 풀리지 않을 듯한 실타래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저널리스트가 10년이 넘게 발굴한 한국 사회의 속살을 만나면서 한 시대의 문제를 공감하며 성찰적인 논쟁을 지필 수 있을 것이다.
 

조이여울 기자가 차갑게 써 내려간 10년의 기록

“조이여울 기자는 대한민국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단지 다른 기자들은 눈여겨보지 않는 소수자들의 삶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단순한 ‘기록자’에 머물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마치 없는 사람 취급 받았던 성 소수자, 입양인, 성폭력 생존자 등 다양한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가시화 했고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진정 ‘이슈 생산자’였고, 가장 주목할 만한 기자였다.”
                                                              -전홍기혜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 편집국장 


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국장이 묘사한 것처럼 조이여울 기자는 ‘이슈 생산자’였다. 특히 여성과 소수자, 인권, 저널리즘 영역에서 영향력 있는 담론을 생성해왔다. 지난 10년간 조이여울 기자의 글과 말에 대해 ‘날카롭다’고 기억하는 이가 많다. 

20대부터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해 논쟁적인 오피니언 리더로 활동해온 저자는 신랄하고 비판적으로 한국 사회에 입을 대왔다. 뿐만 아니라 다른 언론들의 행태와 기사에 대해 비평하는 일도 꾸준히 해왔다. 저자는 특히 다른 어떤 영역보다 미디어에 종사하는 기자들에 대해서 유독 책임감을 더욱 강하게 주문한다. 

적어도 기자라면 세상이 가르쳐준 대로 생각하고, 배움 없이 취재하고, 성찰의 과정 없이 기록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p.261) 

저자는 “저널리스트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 것과 다른 세계관을 만나 부단히 부딪히고 깨지는 작업인 동시에, 그를 통해 끝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저널리스트의 기록은 사회의 그늘지고 어두운 곳에 빛을 쏘이게 하는 작업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 믿음으로 10여 년간 기록한 한국 사회의 초상!

저자와 함께 뜨겁게 보고, 우리 주변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글이 가질 수 있는 힘, 희망

“글이 가질 수 있는 힘 혹은 영향력은 어디까지일까. 문제에 얽힌 전 과정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돌아보고 궁극에 다른 시각을 갖게 하는 것,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힘은 거기서 생겨나는 게 아닐까.
이 책 한 권을 읽은 후 나는 여러 가지로 명쾌해졌다. 시원한 기운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김소희 ‘작은자 야간학교’ 교사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누구나 이 추천의 글에 공감할 것이다. ‘시원하고, 따뜻하고, 재미있다’고. 이 책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로부터 “재미있다”, “시원하다”는 반응을 끌어내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2장 인터뷰>의 예만 들어보더라도 야생동물, 미혼모, 탈핵, 아동성폭력 후유증, 토종씨앗 지키기 운동 등 한국 사회의 뜨거운 현안 이야기들이다. 조이여울 기자는 기록을 하며 사람들을 만나는 작업은 “언제나 즐겁고 생기가 넘치는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무늬를 만들어가는 생동하는 현장이 있고, 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여러 독자에게 공유되고 사회로 확산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기쁨이 있기에, 저널리스트로서 나의 삶은 지지치 않을 것이며 인터뷰 또한 계속될 것이다.” (p.123) 

조이여울 기자가 말하는 기록 작업은 생동하는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며, 거기서 희망을 발견해서 매체를 통해 공유하고 확산시키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즐겁고 생기가 넘치는 작업”의 생생한 기운이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 책은 한 저널리스트의 고뇌에 찬 10년의 기록일 뿐 아니라, 그 기록을 통해 사회 곳곳에서 소리 없이 희망의 씨앗을 뿌려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소중하다.  

 

저자 소개: 조이여울

저널리스트. 20대부터 페미니즘과 사회운동에 대한 논쟁적인 오피니언 리더로 활동해오다 2003년 미디어 <일다>를 창간하였다.
왜곡되거나 날조된 사회적 사건을 재조명하고 은폐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발굴하는 글을 다수 발표함으로써, 주류 저널리즘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며 언론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여성주의 저널리즘, 평화 저널리즘을 교육하는 미디어운동가이기도 하다.
 

차례

여는 글 성찰하는 사람의 글은 따뜻하다 

1장. 기획모든 문제에는 해결의 열쇠가 있다

“우리는 보복이 아닌 회복을 원한다”
-살인피해자 가족이 말하는 사형제와 진정한 치유

스무 살 임씨의 일기장, 그슬린 진실
-섹스산업의 호황 속에 거래되는 여성의 몸

평등하게 일하고 싶다
-노동의 성별 분리와 차별에 대한 보고서

너무 젊지도, 너무 늙지도 말라?
-나이주의, 고용시장을 움직이는 이상한 법칙

‘또 하나의’ 사람, 트랜스젠더
-성 염색체에 갇히지 않는 인간의 다양성에 대하여
 

2장. 인터뷰그들 스스로 말하게 하라

길 위에서 길을 묻다
-야생동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황윤 감독

“한국은 잘사는데, 왜 아이를 포기하는 거죠?”
-한국입양아의 아버지 리처드 보아스, 미혼모 인권을 말하다

핵 없는 미래, 정치 패러다임 변화에 달렸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박진희 소장에게 듣는 ‘녹색정치’의 가능성

“성폭력을 둘러싼 ‘시선’이 변해야 해요”
-생존자 너울이 말하는 아동성폭력의 특성과 후유증

‘오래된 미래’를 심는 사람
-토종씨앗 지키기 운동의 싹 틔운 농부 한영미
 

3장. 발굴 ▶ 숨은 그림, 혹은 은폐된 의미 찾기

이름 없는 수많은 ‘유관순들’을 기억하라
-10대 여성과 기생들이 주도한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며

묻힌 해녀 정신 ‘캔다’
-우리가 몰랐던 해녀공동체의 역사와 삶

여성의 몸은 어떻게 생체실험 대상으로 전락했나
-황우석 사태의 진실을 파헤치다 

4장. 언론비평 ▶ 진실은 어떻게 왜곡되고 가려지는가 

► 뉴스는 포르노다?

특종이란 무엇인가/ 언론이 좋아하는 ‘전문가’/ 신문 기사에서 ‘장애인 찾기’/ 성폭력 보도, 누구의 시선을 대변하나 / 사실 왜곡 일순위는 ‘동성애’/ 어머님의 눈물 보여주려 했다? / 버지니아공대 총기 참사와 한국 언론 / 환경비용 고려하지 않는 ‘그들만의’ 계산법 / 언론이 만든 전쟁은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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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1만인 건립위원이 되어주세요.

일다와 함께 2011. 8. 1. 17:11

 

전쟁범죄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에 대해 알리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며, 후세에 평화와 역사교육의 산실이 될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이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있는 성미산 자락에 부지를 확정했다. 올해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기념일’에 맞춰 개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1만인 건립위원 참여를 요청하고 있다.

원래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은 그 역사적 의미에 맞게 서대문 독립공원 내에 건립될 예정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광복회와 순국선열유족회 등의 반발로 성사되지 못했다. "독립운동 성지의 순수성을 훼손한다"나? 이것이 한국 사회의 초라한 자화상이다. 아직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할 명분으로만 사용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관련 기사1: 광복회의 ‘위안부’ 박물관 백지화 요구에 대해 (2007/06/07 일다)
관련 기사2: 박물관 착공식 후손들이 우리의 역사를 보고 배우길 (2009/03/09 일다)
관련 기사3: 성미산에 둥지튼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2011/08/01 일다)


*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1만인 건립위원이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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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장자연씨의 죽음 앞에서- 2009년 3월 일다 시론

일다와 함께 2011. 3. 9. 21:17

‘성상납’이 아니라 인신매매다
[시론] 故 장자연씨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조이여울/ 2009년 3월 18일) 
 
가끔씩 한국사회가 정말 민주주의 사회이고, 여성운동의 발전과 함께 여성의 권리가 빠르게 신장된 사회가 맞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故 장자연씨의 죽음에 얽힌 사건들도 이러한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왜 아직도 대한민국의 ‘어떤 여성’들은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인 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힌 채 살아가고, 죽음으로써야 그 사실이 수면위로 올라오게 되는 것일까요. 장자연씨의 죽음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성적 착취구조, 대상이 아닌 ‘고리’를 끊으려면
 
소속사 대표로부터 술자리에 나가고 접대를 하도록 강요를 받았고 폭행을 당했다는 등의 내용이 적힌 문건이 장자연씨 자필로 확인되었습니다.
 
연예인을 사이에 두고 매니지먼트사와 일명 ‘리스트’에 해당하는 거물급 인사들 간의 거래관계에 대해, 흔히 ‘성상납’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용어는 현실을 잘 드러내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공정한 계약관계 속에 묶여있는 연예인들의 위치를 고려한다면, ‘성상납’이 아니라 성적 착취이며 ‘인신매매’라는 용어가 더 적절합니다.
 
이 개념을 분명히 해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성적인 폭력의 문제에 대해선 여전히 사회적으로 피해를 입은 쪽이 오히려 비난을 받게 되기 일쑤입니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상납’이라는 개념과 심지어 ‘공생관계’라는 인식 속에서, 연예인들의 지위와 이미지는 더욱 하락하게 되고 그만큼 성적인 폭력에 취약해지게 됩니다. 이 사건이 ‘연예계의 더러운 뒷사정’ 정도로 치부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둘째, 가해자 혹은 가해집단이 피해자의 생존권을 쥐고 있을 경우, 인권침해를 당하는 당사자들은 사실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 없게 됩니다.
 
일례로, 지난 해 KBS가 충격적인 ‘스포츠 성폭력의 실태’를 보도함으로써, 이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태조사에 착수했지만 선뜻 피해를 고발하는 학생이나 학부모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가해자가 학생의 목줄을 쥐고 있거나, 가해자를 두둔하는 집단이 학생의 장래를 좌지우지할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예 매니지먼트사로부터 성적 착취를 당하는 연예인들은 사회의 모욕적인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롭지 않고, 무엇보다 자신의 생존권을 위협받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스스로 검은 고리를 증언하고 끊어낸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매니지먼트 관련 계약의 인신매매 성격과 성매매의 구조를 명확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무원 비리 척결하듯 정부가 조치 마련해야
 
우리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더 이상 동종업계의 ‘관행’이라고 이야기되지 않는 사회를 바랍니다.
 
유력 인사들의 ‘리스트’가 거론되면서, 한 켠에선 이번에도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깊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경찰과 검찰, 정부에 대한 신뢰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장자연씨가 직접 쓴 문서라는 것이 확인된 이상, 장씨가 문건을 쓰게 된 이유와는 별도로 연예 매니지먼트를 둘러싼 잔혹한 범죄에 대해 경찰은 수사를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불공정 계약에 따른 인신매매의 구조, 성적인 착취와 매수의 관행을 깨기 위해서는 그 수요와 공급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 매니지먼트 사와 방송과 언론, 대기업에 얽힌 고리를 낱낱이 파헤치고 법과 제도로 엄정하게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에 그칠 문제도 아닙니다. 방송시장에서 연예인, 그것도 신인여자연예인의 위치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파악하고 있다면, 약자의 입장을 배려한 ‘적극적인 조치’가 절실해 보입니다. 공무원 비리를 척결하듯 국가가 나서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처벌과 단속 이상의 적극적인 조치는 바로 예방책을 만드는 것입니다.
 
연예 매니지먼트의 공정하지 않은 계약관계는 그 자체로 연예인에 대해, 특히 여성연예인에 대해 인권침해를 가져옵니다. 절대로 시장에 맡겨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인-노예로 비유되는 연예인과 소속사와의 현 권력관계를 합법적인 중개사와의 관계나 일반 회사의 노무관계 수준으로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받지 않아도 되는 사회, 공정하지 않은 거래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성적인 착취가 공생관계로 미화되지 않는 사회, 수사기관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회를 꿈꾸며, 이제 고인이 된 장자연씨의 명복을 빕니다.   일다 2009년 3월 18일 보도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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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4. 피해를 말할 수 있는 사회인가?

일다와 함께 2011. 2. 5. 14:22
폭력 피해자를 죄인 취급하는 사회
<조이여울의 기록>(4) 살인피해자 가족의 죄의식, 그 사회적 의미 
 
우리는 살인, 성폭력과 같은 강력 범죄를 미디어를 통해 자주 접하면서 살고 있다. 범행의 양상이 끔찍할수록, 피해자의 규모나 피해의 정도가 클수록 사회여론이 들썩인다. 그런데 나는 범죄 사건을 접하는 대중의 여론이 상당히 소모적이라는, 그래서 피곤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성폭력, 특히 아동에 대한 성폭력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냐’며 가해자를 향해 비난을 퍼붓는다. 그러나 그 반응은 기껏 하루 이틀 후면 관심에서 밀려날 정도의 중요성밖에 지니지 않고 있다. 바로 이 가벼움 때문에, 나는 범죄 사건이 마치 사람들로부터 ‘열 받는다’ ‘충격적이다’ ‘화난다’ 하는 감정을 집단적으로 배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취급된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가해자를 향해 더 많은 분노를 표한다 해서, 그것이 사건의 해결이나 피해자의 권리 회복에 더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죄 사건의 구체성이나 가해자의 정체를 궁금해하며 그에 관한 정보를 돌리는 만큼, 피해자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그다지 비중을 두어 고려해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극심한 폭력으로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이 지금 어떤 상황일지, 어떤 도움이 필요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관한 문제. 즉 피해자의 삶과 회복의 문제는 긴 이야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하루 이틀 만에 사라져버리는 연기 같은 여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닌 주제이다.
 
피해를 말할 수 있는 사회인가?
 
▲2010년 6월 21일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와 천주교주교회의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 주관 <인권을 위한 살인피해자 가족모임 초청강연> 좌측부터 공지영, 살인피해자 가족 김기은, 로버트 컬리,버드 웰시 ©국제 앰네스티  

 
“한국 (살인피해자) 가족들과 만나면서, 이 사회에서 그들이 어떻게 대우 받고 있는지를 보고 몹시 화가 났다. 너무 힘들어하고 있었다. 사회적 낙인이 많은 것 같다. 마치 가족들이 무슨 잘못을 한 것처럼 말이다.” (로버트 컬리)
 
작년 6월 20일, 사형제도 폐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한국에 온 미국의 ‘인권을 위한 살인피해자 가족모임’ 버드 웰시(71), 로버트 컬리(55)씨는, 국내 살인피해 가족모임인 ‘해밀’ 소속 가족들과도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다음 날 열린 사형제도 반대 메시지를 담은 초청강연이 끝날 무렵, 두 강연자는 “어제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며 다른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살인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처우와 관련한 것이었다. 버드 웰시씨는 사랑하는 이가 살해당했는데도 가족들은 아무런 정보도, 지원도, 안내도 받을 수 없는 한국의 현실을 지적했다. “경찰과 검찰은 가해자 찾기에 관심이 있지 피해자를 지원하는 쪽에는 관심이 없다”며, 그는 “피해자를 지원하는 체계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버드 웰시씨는 또 “(살인피해자) 가족들이 자기 목소리 내길 어려워하고, 자기 경험을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아시아의 상황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딸 줄리가 죽고 난 후, 자신은 14년간 딸에 대해 얘기하고 다닌다고 말했다. 줄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그는 당일도 딸의 사진을 보여주며 청중들 앞에 자랑스럽게 소개했었다.
 
로버트 컬리씨는 더 나아가, 한국 사회가 “피해자를 바라보는 눈”에 대해 일침을 놓았다. 피해자들이 뭔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 일을 당했다는 식의, 가혹한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피해자를 나쁜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나에겐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려는 “일종의 방어책”인 것 같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피해자를 바라보는 눈이 바뀌길 바란다”고 한국 사회에 당부하며, “살인피해자 가족들이 본인이 잘못한 느낌을 극복할 수 있길, 살아가는데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관련한 사회적 활동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당한 자’를 향한 냉정한 시선
 

주위로부터, 그리고 사회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할 살인피해자의 가족들이 오히려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죄인이 된 기분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이치상으론 말도 안 되지만 그 상황이 어떤 건지 짐작해보는 건 우리에게 어렵지 않다.
 
죄지은 자만 죄의식을 갖는 게 아니다. 피해자도 죄의식을 갖는다. 내가 그때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성폭력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해서 자식이 살해당한 게 아닐까? 내가 맞을 짓을 하기 때문에 남편에게 맞고 사는 건가? 내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남들은 겪지 않는 고통을 겪는 것일까 등등. 폭력의 피해자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릴 때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나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가? 피해자들이 스스로를 탓하지 않도록 지지하고 위로해주는 역할을 사회공동체가 해주어야만 한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라고 이야기해줘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어찌된 일인지 피해자들의 마음과 몸을 돌보는 일에는 너무나 인색하다. 심지어 성폭력 피해자 ‘유발론’ 같은 악의적인 통념이 자리잡고서, 언제든 피해자를 향해 고개를 들이밀 준비가 되어 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충격 속에 있는 사람을 향해, 우리 문화가 가하고 있는 낙인을 몇 가지 언급해보자. “자식 먼저 보낸 죄인”이라거나, “부정 탔다”거나, “며느리를 잘못 들여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느니, 심지어 “남편을 잡아먹었다”는 둥의 저주에 가까운 말들이 오간다. 고통 당하는 이의 삶을 완전히 꺾어놓으려는 의도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처럼 가혹한 이야기를, 무서운 시선을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설사 이 정도로 낙인을 찍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엔 고통을 겪은 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안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오히려 끔찍한 상처일수록 ‘묻어야 할 이야기’가 된다. 피해를 당한 일이 “뭐 자랑이라고 얘기하느냐”는 말 속에는, ‘타인의 고통을 들어줄 이가 없다’는 각박한 사회의 모습이 담겨 있다.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세상 앞에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이고, 결국 그만큼 죄책감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공포를 당사자에게 전가하는 방식
 
피해를 겪은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일종의 방어책”인 것 같다고 말한 로버트 컬리씨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저 사람들은 뭔가 문제가 있어서 저런 고통을 겪는 거야’ 라고 생각해버리는 순간 그것은 곧 특별한 문제가 없는 사람들, 즉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하는 위안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문화가 동서양 역사를 통틀어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고 보는데, 그것은 범죄 피해와 같은 사건뿐 아니라 ‘질병’과 같은 고통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왔다.
 
중풍과 한센병 등의 질병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공격들- ‘신의 형벌’을 받는 죄인이라고 여기고, 사회와 분리시키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눈에 띄면 돌로 쳐서 죽이기까지 했다–도 그 이면에 깔린 심리는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아직도 에이즈 환자에 대해 ‘신의 벌’이라고 이야기하는 몰상식한 종교인들이 있다.) 무서운 질병에 대한 공포를 환자에게 전가해서, 환자를 (자신과는 다른) 죄인으로 낙인 찍음으로써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이다.
 
환자를 보면 연민을 느끼고 기금을 마련하는 등 도움을 줘야 한다는 상식적인 생각 대신, 죄가 있다(문제가 있다)고 경멸하고 공동체에서도 분리해버리려는 시도에는 그 사회구성원들의 ‘무지’와 ‘공포를 다루는 비굴한 심리’가 깔려 있다. 이런 식으로 ‘나와는 다른’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불행이라고 간주하려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 겪게 된다면 어떠할 것인가. 내 자녀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 것인가.
 
한센병, 에이즈 등의 질병은 사회적인 공포가 아니었더라면, 훨씬 더 그 증상을 감소시키거나 예방책과 치료책이 빨리 나와주었을 거라는 정보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피해자의 발언권과 회복을 지원하는 사회
 
살인, 성폭력과 같은 사건을 접할 때 우리는 관심을 누구에게 보내는가? 혹시 끔찍한 범죄에 대한 우리의 공포감을 무마시키기 위해, 부러 피해자들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리는 것은 아닌가? 또 사회는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제 할일 다 했다고 보는 것 아닌가?
 
사회공동체가 폭력 피해자들을 보호하고 배려해주지 않을수록, 범죄에 대한 공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그와 같은 끔찍한 경험이 자신에겐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에겐 일어나지 않는 일일 거라고 마음으로 회피하게 되고, 그 결과로 피해자 집단은 더더욱 사회에서 고립되고 격리되어 갈 것이다.
 
가해자를 욕하는 것은 피해자의 아픔에 동조하고 그 사연을 들어주고 위로를 보내기보다 훨씬 쉽다.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피해자를 지원하는 일보다 단순하고 빠르다. 그러나 사회구성원이 폭력을 겪어 너무나 고통스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함께 아픔을 나누고 덜어주고 위로해주고 다시 살아갈 힘을 북돋워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정의’ 실현이자 사회공동체의 기본 역할 아닐까.
 
하루가 머다 하고 심각한 범죄 사건이 보도되는 우리 사회에서, 언론을 통해 전달되는 폭력행위가 선정성을 담고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 절망하지 않고 하루빨리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옮겨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일다> 2011년 2월 5일에 실림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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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정의 <조용한 마음의 혁명> 구입할 수 있는 곳

일다와 함께 2010. 10. 22. 16:59

* <트라우마>의 역자 최현정의 <조용한 마음의 혁명: 심리학으로 본 한국사회 마음의 건강> 구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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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마음의 혁명>

부제: 심리학으로 본 한국사회 마음의 건강


<책 소개>


사람들이 치유 작업을 하면 잘 될 수 있을런가 물어옵니다. 그러면 저는 ‘잘 될 것이라 믿는다’고 전합니다. ‘마음을 여는 인간의 능력을, 어둠을 밝히는 투명성을 믿는다’라는 그런 뜻에서 저는 잘 될 것이라 믿습니다. 나는 그 투명성을 찾으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 투명성 덕에 오히려 나 자신이 치유 받습니다. 인간에게 낯선 이 땅 위에서, 조용한 혁명을 함께 시작했으면 합니다.”


상심리학자인 저자가 임상 활동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를 보여주고, 한국 사회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의 토대를 제공한다.


최근 눈에 띄게 심리치유 에세이나 심리학에 관련된 책들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이 책이 가지는 유일한 특징이 있다. 이 책은 단지 한 개인의 내적 병리를 분석하기 보다는, 사회 구조와 개인의 내면을 연결하는 조망을 통하여 한국 사회의 구조와 역사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과, 개인의 심리가 한국사회를 작동시키는 과정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한다.


많은 심리학 서적들은 사람의 마음을 ‘분석’하고 ‘평가’하는데 그친다. 사회의 고통에 대한 해결책으로 피상적인 대인관계 처세술을 던지거나 개인 내면의 병리 탓이라고 말할 뿐이다.


반면 이 책은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내면적 힘을 긍정하는 철학과 인간관을 기반으로, 무력하고 상처받은 개인들을 넘어서 그가 발 딛고 있는 현실과 자기 심리를 이해하고, 타인과 이웃의 마음에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통로를 그려 보인다.


특히 인간 내면의 부정적인 측면의 기원을 이해하고 이를 건강하게 통합할 수 있는 관점을 유지한다. 일상의 모순과 불합리성에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심리를 이해하고, 무력한 개인이 되기보다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보다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힘을 북돋는다.


2010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수여하는 우수저작상 수상.


<추천사>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많은 갈등과 고통, 이 깊은 상처들은 대부분 자신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온 사회적 가치들에 의해 규정되고 점령된 채 살면서 입은 것들이다.

폭력 앞에 개개인은 대체로 무력하다. 본인 스스로도 알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갈등, 분노, 좌절들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게 되나 방치된다.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최현정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제 마음의 소리를 듣는 자아 여행을 권한다. 최현정의 발언은 매우 통찰력이 있다. 들을 수 있어야 공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 마음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이웃들의 아픔 또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자신뿐 아니라 자신 밖의 모든 존재들과의 새로운 관계이다. 그리고 이웃들과의 온전한 관계는 사회를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조용한 마음의 혁명’이다. 모든 변화는 제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참으로 혁명이라고 할만하다.

- 이화영(인권의학연구소 소장)


저자는 대학재학 시절부터 트라우마와 다양한 국가적, 사회적 폭력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활동해온 임상심리학자다. 이 책은 그녀의 생생한 현장 체험과 냉철하면서도 폭넓은 학문적 분석, 예리한 임상적 통찰력이 결합되어 녹아 있는 책이다.

나는 저자 자신과 이 책이 조용한 마음의 혁명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가식을 벗어 던진 진정한 자기사랑과 역경을 이겨낸 사람만이 이룰 수 있는 진정한 심리적 성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 이훈진(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인간 내면의‘ 선함’과‘ 힘’, 그로 인한 인간 스스로의‘ 치유능력’에 대한 필자의 확고한 믿음은 폭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를 지원하는 현장에서‘ 조용한 혁명’을 일으킨다.

<마음의 조용한 혁명>은 사람 마음을 깊게, 넓게,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여 어떤 마음을 품고 행동할 것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사람에 대한 사유’에 관한 책이다.

겨울날의 메마른 나뭇가지에 초록빛 새싹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며 잘 될 것이라 믿는다는 필자의 말처럼, 인간에 대한 긍정과 희망이 모여 이 땅 위에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 평화박물관

 

/책의 구성/

사람은 상처입기 쉽고 누군가를 필요로 하며 진실 되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사람-중심 상담의 창시자인 칼 로저스는 진정 한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면 누구이든 그 깊이에는 ‘미움 없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라나려는 강한 힘이 깃들여 있으며, 그것을 방해하는 사회적 요인을 직시해야 한다. 혼란을 꿰뚫고 인간을 만나려는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사회의 변화를 로저스는 ‘조용한 혁명’이라고 불렀다.

이 책은 사람의 힘을 긍정할 수 있는 근거들을 찾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내 안의 갈등을 보살피며, 또 한편으로 타인이 겪는 고뇌를 헤아리며, 서로가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세계의 작동을 똑바로 바라보고자 한다. 마음의 눈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므로, 두 눈을 가리고서 세상이 시커멓다 체념하는 일은 괴롭다. 자유로우려면 마음에서 오는 울림을, 마음이 내게 말하는 것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진정한 나 자신을 잃게 하고 다른 사람과의 연결을 왜곡하는 자본주의 속에서,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있는 모습 그대로 성장해 나가려는 인간의 경향을 가로막는 어른의 세계 속에서, 내 안의 진실된 내 모습과 접촉할 수 없는 정서무시환경 속에서, 그리고 인간 왜곡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폭력 속에서 살아남고자 분투하는 인간의 모습을 찾는다.

1장. 화려한 가면은 벗어놓고

좋은 학벌에 번듯한 직장, 돈 많고 화려한 인생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꿈꾸는 명예로운 삶이다. 한국 사회에 여러 차례의 경제 위기가 닥쳐오면서 극화된 경제적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은 그만큼이나 우리의 삶을 규격화하고, 단순화 시켰다. 자본주의 한국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니다. 20세기 초반의 프로이트 시대에는 자기 내면의 선함과 악함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 시대에는 왜곡된 자기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많다. 미, 부, 명성처럼 부풀려진 겉모양에 마음이 팔리다 보니 진실한 정체성으로 채워지지 못하는 공허함, 그것이 우리 시대를 반영하는 마음의 고통이다.

2장. 성장할 권리를

위기에 빠진 사회의 역사 속에는 늘 십대가 있었다. 세상을 고민하고 철학을 공부하던 십대들의 공동체가 곧 위기의 순간에 변화를 이끌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경쟁과 경제적 우위를 성취의 기준으로 삼는 인간관 안에서 아이는 아직 이길 수 없는, 즉 어른이 되지 못한 미성숙한 상태로 정의된다. 그러한 관점 안에서  아이는 어른이 되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므로 아이가 본연 그대로 성장할 여지는 제약된다. 성장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아이의 존재가 ‘어른의 세계’에 의해 무시되고 있다.

3장. 마음의 목소리 듣기

마음에 방어가 생긴 연유를 이해할 수 있다면, 방어 이면에 놓인 깊은 내면과 만날 기회가 생긴다. 그런데 우리는 두려운 나머지 방어하고자 애쓰고, 그 대가로 수많은 희생을 치르게 되기도 하며, 진실로부터 점점 멀어져 간다. 우리가 가시털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계속 그 옷을 두르고 날카롭게 털을 세우며 나약한 나 자신을 숨길 것인가 혹은 진실로 한걸음 나아가 사람들과 손잡을 것인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이다. 

4장. 폭력의 기억, 침묵당하기를 거부하다

폭력의 피해자들은 공통된 경험은 함께 이야기하면서 울고, 웃을 수 있었기에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이렇듯 궁극적으로는 공감하는 사회, 또 정의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이 옆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방관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지혜로운 결론을 내릴 채비를 잘 갖추어 보자. 자기 역량의 테두리를 설정하고, 할 만한 수준에서 조금씩 실천해보는 소중한 경험도 간직한다. 마음의 힘은 그 안에서 솟아오른다. 이건 왠지 옳지 못하다 싶을 때, 무엇이 옳지 못하고 무엇이 옳은 걸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과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지켜내는 일이 중요하다. 공동의 정서적 경험은 공동체 형성의 기반이 된다. 그 정서 경험이 분노일 때 그것은 의분이고, 의분은 어우러진 삶을 지향하는 공동체의 힘의 원천이 된다. 그 정서 경험이 슬픔일 때 그것은 애도이고, 애도는 우리의 공동체를 감싸 안는 따뜻한 기운이 될 것이다.


/차례/

들어가는 말 / 어둠을 밝히는 무한한 마음의 가능성

1장 화려한 가면은 벗어놓고
-건강한 자기사랑
-성공 신화의 쳇바퀴
-어떤 자살에 대하여
-우리는 무력할 뿐인가
-울타리, 안과 밖
-깨어있는 접촉

2장 성장할 권리를
아이들의 우울을 이해하려면
공부 못하는 아이
심리학에서 보는 우리 교육 현장
이별의 슬픔을 겪는 아이들을 위해
아동성폭력, 안전하지 않은 사회
십대들의 힘으로 변화하는 사회

3장 마음의 목소리 듣기
-어김없이 욱신대는 마음의 흉터
-사랑받지 못하는 고통
-연애와 상처 입은 사랑
-실체가 없는 마음의 체험
-호저 고슴도치의 가시 털, 방어기제
-충분히 슬퍼하기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4장 폭력의 기억, 침묵당하기를 거부하다
-트라우마
-국가 폭력, 그 비인간성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
-우리 집 옆 골목의 가정폭력과 성착취
-폭력과 해리현상
-폭력에 맞서는 힘
-정의로운 행동

 

<저자 소개 - 최현정> 

서울대학교에서 임상·상담심리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임상심리 수련을 마쳤다. 국가폭력, 성폭력, 조직적 성착취 체계에서 벗어나 삶을 회복하려는 사람들과 함께 일했으며 이와 관련된 글을 쓰거나 연구를 했다.

현재 상담실 안에서는 심리치료를 하고 있고 상담실 밖에서는 공동체 속에서 치유력을 발견해나가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심하고 있다. 파괴적인 환경으로 인한 삶의 고통을 병리화 하는 입장에 반대하며 혼자였던 사람들이 서로 만나 자기 안에 잠재된 힘을 발견하게 될 때,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맑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서로 <트라우마: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고문폭력 생존자 심리치료>, <성격장애 로샤평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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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장자연씨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일다와 함께 2009. 3. 18. 06:04

‘성상납’이 아니라 인신매매다 
 
가끔씩 한국사회가 정말 민주주의 사회이고, 여성운동의 발전과 함께 여성의 권리가 빠르게 신장된 사회가 맞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故 장자연씨의 죽음에 얽힌 사건들도 이러한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왜 아직도 대한민국의 ‘어떤 여성’들은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인 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힌 채 살아가고, 죽음으로써야 그 사실이 수면위로 올라오게 되는 것일까요. 장자연씨의 죽음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성적 착취구조, 대상이 아닌 ‘고리’를 끊으려면

 
소속사 대표로부터 술자리에 나가고 접대를 하도록 강요를 받았고 폭행을 당했다는 등의 내용이 적힌 문건이 장자연씨 자필로 확인되었습니다.
 
연예인을 사이에 두고 매니지먼트사와 일명 ‘리스트’에 해당하는 거물급 인사들 간의 거래관계에 대해, 흔히 ‘성상납’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용어는 현실을 잘 드러내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공정한 계약관계 속에 묶여있는 연예인들의 위치를 고려한다면, ‘성상납’이 아니라 성적 착취이며 ‘인신매매’라는 용어가 더 적절합니다.
 
이 개념을 분명히 해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성적인 폭력의 문제에 대해선 여전히 사회적으로 피해를 입은 쪽이 오히려 비난을 받게 되기 일쑤입니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상납’이라는 개념과 심지어 ‘공생관계’라는 인식 속에서, 연예인들의 지위와 이미지는 더욱 하락하게 되고 그만큼 성적인 폭력에 취약해지게 됩니다. 이 사건이 ‘연예계의 더러운 뒷사정’ 정도로 치부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둘째, 가해자 혹은 가해집단이 피해자의 생존권을 쥐고 있을 경우, 인권침해를 당하는 당사자들은 사실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 없게 됩니다.
 
일례로, 지난 해 KBS가 충격적인 ‘스포츠 성폭력의 실태’를 보도함으로써, 이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태조사에 착수했지만 선뜻 피해를 고발하는 학생이나 학부모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가해자가 학생의 목줄을 쥐고 있거나, 가해자를 두둔하는 집단이 학생의 장래를 좌지우지할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예 매니지먼트사로부터 성적 착취를 당하는 연예인들은 사회의 모욕적인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롭지 않고, 무엇보다 자신의 생존권을 위협받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스스로 검은 고리를 증언하고 끊어낸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매니지먼트 관련 계약의 인신매매 성격과 성매매의 구조를 명확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무원 비리 척결하듯 정부가 조치 마련해야
 
우리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더 이상 동종업계의 ‘관행’이라고 이야기되지 않는 사회를 바랍니다.
 
유력 인사들의 ‘리스트’가 거론되면서, 한 켠에선 이번에도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깊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경찰과 검찰, 정부에 대한 신뢰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장자연씨가 직접 쓴 문서라는 것이 확인된 이상, 장씨가 문건을 쓰게 된 이유와는 별도로 연예 매니지먼트를 둘러싼 잔혹한 범죄에 대해 경찰은 수사를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불공정 계약에 따른 인신매매의 구조, 성적인 착취와 매수의 관행을 깨기 위해서는 그 수요와 공급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 매니지먼트 사와 방송과 언론, 대기업에 얽힌 고리를 낱낱이 파헤치고 법과 제도로 엄정하게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에 그칠 문제도 아닙니다. 방송시장에서 연예인, 그것도 신인여자연예인의 위치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파악하고 있다면, 약자의 입장을 배려한 ‘적극적인 조치’가 절실해 보입니다. 공무원 비리를 척결하듯 국가가 나서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처벌과 단속 이상의 적극적인 조치는 바로 예방책을 만드는 것입니다.
 
연예 매니지먼트의 공정하지 않은 계약관계는 그 자체로 연예인에 대해, 특히 여성연예인에 대해 인권침해를 가져옵니다. 절대로 시장에 맡겨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인-노예로 비유되는 연예인과 소속사와의 현 권력관계를 합법적인 중개사와의 관계나 일반 회사의 노무관계 수준으로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받지 않아도 되는 사회, 공정하지 않은 거래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성적인 착취가 공생관계로 미화되지 않는 사회, 수사기관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회를 꿈꾸며, 이제 고인이 된 장자연씨의 명복을 빕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조이여울 
2009/03/18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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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hetree 2009.03.19 15:17 Modify/Delete Reply

    아..인신매매라.. 정말 충격입니다...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 cognate 2009.03.20 14:41 Modify/Delete

      오늘 유가족들이 성매매특별법 위반 등의 혐의로 문건에 거론된 인사들을 경찰에 고소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울컥하더군요. 유가족들도 얼마나 힘들까 싶구요. 지금은 누구보다도 장자연씨의 죽음에 대해 함께 가슴 아파해줄 사람들이 필요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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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강간’ 최초 인정한 판결이 갖는 의미

일다와 함께 2009. 1. 17. 00:20


2002
년 울산에서는 한 남성으로부터 지속적인 구타와 강간을 당해 온 여성이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그 남성이 자는 동안 목을 졸라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늘 강간을 당했다. 강간을 피할 수 없었다”고 진술한 그 여성이, 10여 년간이나 세상에 구조요청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한 가지다. 그것은 가해자가 그 여성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정조권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16, 부부관계에서 강간 혐의를 인정한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2004, 서울중앙지법이 아내를 성폭행한 남편에 대해 강제추행 혐의를 적용한 이래, 부부관계에서 아내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인정한 판결로 주목할 만하다.

 

부산지법 제5형사부(재판장 종주 부장판사)는 필리핀 여성인 아내를 흉기로 위협해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기소된 한국인 남편에 대해 징역 2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번 판결이 우리 사회에서 화제가 되는 것은 바꿔 말해 지금까지 우리 역사 속에서 ‘아내’라는 이름의 여성들은 남편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해도 법이 구제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들이 겪은 피해가 성폭력이라는 사실조차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내의 몸을 남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로 보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인식은 성폭력 범죄를 부녀에 대한 정조 침해의 죄로 바라보는 사회적 통념과 맥을 같이 한다. 성폭력을 한 남자(남편 혹은 남편이 될 자)의 소유인 여성의 몸을 다른 남성이 침범한 행위라고 보았을 때, 부부 간에 강간죄는 성립되지 않게 된다. 정조라는 개념 자체가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적인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을 뜻하므로, 아내와 남편 상호간에는 침해할 정조권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시각은 결국 결혼한 여성에겐 지켜야 할 정조는 있으나 성적 자기결정권은 없는 것으로 본다.

 

강간인데 강간 아니다?

 

여성운동진영에서는 수년 전부터 남편으로부터 폭력과 더불어 성적 학대를 겪는 아내들의 숱한 사례들을 토대로 아내 강간을 인정하라고 요구해왔다. 배우자로부터 가해지는 성폭력은 피해자에게 더 큰 굴욕감과 무력감을 주며, 일상적인 공포에 시달리도록 만든다.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테두리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피해자는 가해자와의 관계망을 벗어나기 어렵고, 지지기반도 없어 그 피해와 후유증도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부부 간 성폭력을 인정하라는 주장은 사회적으로 다분히 급진적인 것으로 읽혀져 왔고 법조계 인사들을 비롯한 많은 남성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아내강간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의 주장은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 부부 사이에 성폭력이 있을 수 없다는 것과 성폭력을 행사했다 하더라도 처벌해선 안 된다는 것.

 

부부 사이에 어떻게 성폭력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이들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성폭력을 정조권 침해범죄로 보고 있으며, 여성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폭력과 성관계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남편이 아내를 강간했다 해도 처벌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성폭력 가해자의 편에 서서 강간인데 강간이 아니다라는 모순된 주장을 해왔다. 그런데 이 같은 주장이 바로 우리 대법원이 1970년에 내린 판결의 내용이다.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경우에는 설령 남편이 폭력으로써 강제로 아내를 간음했다 하더라도 강간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보수적인 한국 법조계의 관행상 이 판례는 30년간이나 족쇄가 되어 우리 사회에서 부부 간 성폭력을 은폐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법원, 왜곡된 통념 깨는데 제 역할 하길

 

2004년 남편의 아내에 대한 강제추행 행위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판결에 이어, 이번 판결이 특히 반가운 이유는 재판부가 성적 자기결정권의 개념을 명확히 했다는 점이다. 검찰은 30년도 더 묵은 대법원 판례를 들먹이며, 남편에 의한 강간사건을 아예 기소조차 하지 않아왔다. 이번 판결도 참으로 늦었다는 판단이 들지만, 기존의 판례를 교과서로 삼는 우리 법조계의 뒤떨어진 현실감각과 인권의식 등을 감안했을 때 박수를 보내야 할 일이다.

 

이번 판결이 그간 성폭력에 대해 떨치지 못하고 있던 사회적 통념들을 떨궈내고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하리라 본다. 그리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수많은 판례들-- 목숨을 건 반항을 한 증거가 있어야만 강간을 인정한다든가, 보호해야 할 인권은 따로 있다는 식의--을 이제 더는 접할 수 없게 되길 바란다.

 
(이 글은 필자가 2004년 8월 법원판결에 대해 논평한 것을 토대로 재구성했음.)

Trackbacks 4 : Comments 12
  1. 산모롱이 2009.01.17 01:03 Modify/Delete Reply

    조금씩 이나마 발전하고 있어서 기쁨네요.
    맨날 밥맛없는 자들 이름만 듣게 되는데
    이런 판결내린 판사님(고종주)의 이름을 알리고 박수를 보내고 싶다.

    • Favicon of https://cognate.ildaro.com BlogIcon 조이여울 기자 cognate 2009.01.17 21:07 신고 Modify/Delete

      어찌보면 당연한 판결이기도 하지만, 법원의 판결문에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사실이 감동을 주긴 해요.

      산모롱이님 반갑습니다.

  2. 정심 2009.01.17 12:01 Modify/Delete Reply

    아무리 부부라도 칼을 들고 성관계를 요구하는 것은 강간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군요.
    부부간에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거늘 흉기로 위협해 욕을 보이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다면 그게 무슨 부부겠습니까

    • Favicon of https://cognate.ildaro.com BlogIcon 조이여울 기자 cognate 2009.01.17 20:47 신고 Modify/Delete

      국경을 넘어온 결혼이주여성은 특히나 남편으로부터의 학대나 성폭력과 같은 범죄에 취약할 테지요. 자원이 부족한 이들에게 더 많이 관심을 기울여야 겠습니다.

  3. kyae 2009.01.17 12:33 Modify/Delete Reply

    부부 간에도 성폭력은 범죄행위입니다. 부부생활에 있어서 성관계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강압적인 성관계까지 법이 옹호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향적인 판결을 내린 판사 이름들은 기억해줄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4. 순발 2009.01.21 17:29 Modify/Delete Reply

    이런 문제가 논란거리가 되는 이유는 부부관계의 모호성 아닐까요? 부부강간이 성립되기 이전에 안전장치가 부족해 보이는.. 성에 관해 여자가 약자인지 남자가 약자인지 조차 막연하고, 부부간 성생활이 상호 의무인 만큼 잠자리를 강요하는 행위를 제한한다면, 거부하는 행위도 제한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결혼은 두사람이 합법적으로 성행위를 하기로 한 약속 또한 사실 아닌가요? 그 약속을 깬건 여자가 먼저라고 봅니다만~ 그 경우 이혼은 물론 위자료도 여자의 책임이라면... 부부강간이 힘을 얻을 것 같고 지금같아서는 곤란하다는 생각

  5. 순발 2009.01.21 17:33 Modify/Delete Reply

    그리고 참고로 제 와이프도 필리핀 여자입니다만..... 전 솔직히 밤이 무섭습니다.
    남자도 거부할 권리같은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하지만 아내를 만족시켜야 하는 것 또한 제가 결혼한 이상은 제 의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로간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문제를 법정까지 가서 남편을 또는 부인을 죄인으로 만들겠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 아닌가요?
    여기 긍정하신 분들 글을 보면 상당히 진보적인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저 생각일 뿐입니다. 실제 자신의 문제가 아니거나, 그러한 문제를 양상하는 생각으로 보이고, 그저 자기할 도리만 다들 잘하고 살았으면 좋겠네요 ^^

    • 살구나무 2009.01.22 00:10 Modify/Delete

      부부 간에 일방이 성관계를 거부하는 것은 이혼 사유가 되지요. 강간을 해도 되는 사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6. 순발 2009.01.24 10:25 Modify/Delete Reply

    그래서 첫글에 적은 것처럼 여성이 성관계를 거부할 경우 이혼은 물론 위자료를 지급해야한다는 것 또한 성문법화해야 부부강간을 성문법화한 것이 타당한 일이라고 본다고 말한겁니다.
    제 댓글 어디에도 강간이 정당하다고 말한 적 없고, 이러한 논의가 말꼬리 잡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번 자살 사건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라는 것과 그것을 성문화하는 제도라는 것이 낮은 수준에서 끝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 것인지 보여주는 사례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멋진 한개의 단어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더 깊게 사고해야 할 거라고 봅니다.

    • Favicon of http://cognate.ildaro.com BlogIcon 살구나무 2009.01.24 14:17 Modify/Delete

      님의 설명을 보니, 위자료에 대한 윗글의 언급이 무슨 뜻이었는지 조금 이해가 가는 군요.
      제 글은 부부싸움이나 성관계 거부와 같은 일들과, 가정폭력이나 부부강간과 같은 형법상 범죄행위와는 다른 범주로 두고서 그 전제 하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폭력 범죄의 경우에는, 이번 법원의 판결내용에서도 그렇지만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였는가 여부가 관건이 됩니다.

  7. 순발 2009.01.24 17:22 Modify/Delete Reply

    성적자기결정권이란 말 자체가 너무 어렵게만 느껴지는군요. 그 권리를 주장하고 또 다른 누군가가 판단한다는 것.....

    결국은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그 몇십년동안 내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서로의 요구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요?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서로간의 차이로 인한 여러가지 문제를 만드는 것이고, 또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이도 저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생 아닌가요?

    그 속에서 가끔 느껴지는 행복감에 즐거워하고, 그런 기억을 남기고 싶은 삶을 모두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요?

    어디까지가 정의이고, 어디까지가 죄일까요? 제가 남기고 싶은 제 마음은

    그 판결에 대한 정보가 그닥 많지 않으므로 단순히 판결 자체가 전향적이라는 이유로 죽어서 더이상 말하지 않는 남자를 강간범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알려진 것처럼 칼을 들고 위협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남자의 행위는 범죄이고, 강간죄의 성립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전의 과정에서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죽은 사람의 삶을 우리가 직접 살아보면 무엇이 문제인지 접근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올바른 판단을 하고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지는 모르는 것 아닌가요?

    우리 모두 화내는 것이 나쁜 것인줄 알면서도 가끔은 화를 내는 잦은 실수를 하는 사람들일지도...

    암튼 님의 글에 반론을 하고 싶거나 토를 달고 싶은게 아니라 그 일(필리핀 여성과 결혼한 남자의 폭력과 자살)에 대해 생각이 좀 많아져서 글 길게 남겼네요..... 이해하시고, 제 와이프 말로는 남자친구 혹은 아이까지 있는 필리핀 여성이 돈 때문에 한국사람과 결혼하는 일이 종종 있고, 그런 경우 어떤 여성은 결혼 후에도 대부분 성관계를 거부한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 여성도 한국으로 온 후 4개월 이상 한차례의 성관계도 허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은 결혼생활(한국여자) 4년중 10회가 되지 않는 성관계에 남자가 매일 술로 살고 가끔은 집을 부수더군요... 가출도 했었고, 제3자인 제 생각엔 그냥 이혼하고 말지라고 생각도 했지만. 남자가 좀 고지식해서 바람피우거나 이혼하는 쪽은 잘 생각 안하더군요. 그래도 지금은 좀 안정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요^^

    사람들의 일이라는게 본인이 아닌 다음에야 잘 알기 힘든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반사회적인 일들이 많더군요..... 법은 그 다음의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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