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차별'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2.01.31 기록12. 나꼼수 ‘비키니 응원 독려’ 사건의 정치성 (2)
  2. 2011.01.14 기록 2. 소수자 집단의 ‘피해의식’ 어떻게 볼 것인가
  3. 2011.01.05 기록 1. 우리는 동등한 존재인가?
  4. 2009.02.17 가사 노동의 정치학
  5. 2008.05.23 노동시장, 여성의 지위 어떻게 변했나

기록12. 나꼼수 ‘비키니 응원 독려’ 사건의 정치성

일다와 함께 2012. 1. 31. 21:24

나꼼수는 비키니 사진 뒤로 숨지 말라

<조이여울의 記錄>(12) ‘가카’의 정치만 중요한가 
 
독재국가일수록, 시민들이 정치에 억눌릴수록 민초들 사이에는 정치적 유머가 는다는 얘기가 있다. 인터넷 방송 <나는 꼼수다>(나꼼수)에 대한 대중들의 엄청난 성원도, 이명박 정권 하에 쌓아온 정치적 억압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나꼼수’는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지만 여러 가지 제도적 법적 장치에 걸려 언론이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던 ‘BBK 사건’ 등 “가카”와 관련된 사안들을 본격 언급하면서, 정치에 대한 답답함을 쌓아왔던 사람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나꼼수’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정작 그 방송내용을 잘 챙겨 듣지는 않는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루고,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송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행자 몇몇이 아슬아슬 ‘버리지 않고 지켜온’ 마초 근성을 언제 드러낼까 싶어 조마조마한 탓도 있다. 그들의 유머 코드는 여성들과 함께 웃는다기보다는, 여성들을 들러리 세우고 웃는 남성집단적이고 분리적인 성향이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번에 논란이 된 ‘비키니 시위 독려’ 건은 감옥에 잡혀 들어갈 만한 정치적 사건을 다룬 것도 아니지만, ‘나꼼수’가 여성비하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상당한 수의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사건이다. 바로 그 정치적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비키니 논란은 ‘표현의 자유’ 문제가 아니다
 
사실 ‘나와라 정봉주 국민본부’ 사이트 ‘1인 시위 인증샷’ 코너에 비키니 차림으로 가슴 부위에 페인팅을 해 사진을 찍어 올린 여성이 있었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은 아니다.
 
‘나꼼수’가 대중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만큼, 그 많은 청취자중에 구속된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을 구명하기 위해 누군가는 비키니 시위를 하든 누드 시위를 하든 혹은 어떤 헤프닝을 벌이지 말란 법 없지 않은가. 정봉주 전 의원의 구속이 논란이 되는 것도 ‘표현의 자유’와 관련 있으니 더더욱.
 
문제는 ‘나꼼수’ 방송 내용과 그 멤버들의 태도이다. 21일 ‘나꼼수 봉주 3회’에서 시사평론가 김용민씨가 “정 전 의원께서는 독수공방을 이기지 못하시고 부끄럽게도 성욕감퇴제를 복용하고 계십니다. 그러하오니 마음 놓고 수영복 사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고 한 방송 내용이 문제의 발단이다. 다시 말해 나꼼수와 비키니 논란은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사안이 아닌 것이다.
 
‘나꼼수’는 여성청취자들에게 수영복 응원을 독려함으로써, 이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이 정봉주 전 의원의 구속을 안타까워하며 지지를 보내는 여성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슬쩍 유머에 실어 ‘드러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27일에는 주진우 시사인(IN) 기자가 정봉주 전 의원을 면회하며 “가슴 응원사진 대박이다. 코피를 조심하라!”고 접견민원인 서신에 적은 것을 트위터를 통해 밝히기에 이르렀다.
 
정봉주 전 의원의 부인은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소개된 바 있고, 지금 이른바 ‘옥바라지’를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말이다. 나는 ‘나꼼수’들의 태도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다고 느끼는데, 그들은 쿨하고 자유롭고 재미있는 모양이다.
 
‘자기들만 자유로운’ 진보 남성상(像)
 
시민사회에는 예로부터 전형적인 ‘진보 남성’의 상(像)이 있다. 여성주의자들이 보기엔 안타깝게도 그것은 마초에 가까운 이미지이다. 정치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에 진보 여성들은 이들과 연대하고, 지지를 보낸다. 그러나 이들 남성들은 이른바 성(젠더)의 정치, 일상의 정치에 있어선 무지하다 못해 때로는 여성주의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 남성들은 ‘진보’라는 이름에 걸맞게 성에 대해서도 자유분방하게 이야기하고, 일부일처제나 가족에 대해서도 자유를 외치곤 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급진’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정작 한국사회의 가부장적인 가족제도나 혈연주의, 인간의 평등한 관계를 해치는 성에 대한 이중규범에 대해 ‘정치적’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언제나 여성주의 진영뿐이었다.
 
바꿔 말하면, 그 남성들은 성적인 규범으로나 혈통 관계에서나 가족제도에서나 유리한 위치에 앉아 취할 것만 취하고, 불리한 위치에 놓인 여성들이 겪는 문제와 갈등은 나 몰라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여성들의 일상에서, 그리고 성의 영역에서 얼마나 복잡하고 버거운 문제들을 풀어가도록 요구하고 있는지, 그 무거움을 모른 채 자기 좋을 대로 말한다.
 
‘가볍게 웃으라고 한 얘기일 뿐인데 너흰 왜 그렇게 무거워? 엄숙주의 아냐?’
‘가카와 관련된 정치 방송인데, 중요한 시국에 작은 일로 진보가 분열음 내서야 쓰냐’
 
아마도 이러한 생각이 그동안 여성들이 보낸 항의와 경고-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지 말라, 진보의 “치어리더”로 취급하지 말라-에도 불구하고, ‘나꼼수’ 측이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꼼수 부리는 그 머리로 충분히 쿨하게 사과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당분간 “침묵”하겠다고 한다.
 
성의 정치, 삶의 정치를 배워야
 
<나는 꼼수다>는 작년 미디어공공성포럼이 수여하는 2011 언론상을 수상했고, 4명의 진행자들이 전국언론노동조합으로부터 민주언론상을 받았다.
 
‘나꼼수’를 언론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가 필요하지만, 정봉주 전 의원이 구속되는 등 ‘표현의 자유’에 대한 탄압이 극심한 시기에 언론계가 주는 격려이자 사회적 메시지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꼼수’는 특유의 꼼수로 여론의 힘을 입어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취하였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은 “쫄지마!” 라고 외치며 대중들의 ‘정치적 발언’을 독려해왔다. 지금 많은 여성들은 ‘나꼼수’ 측이 여성을 대상화하고 비하하는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해서 ‘정치적 발언’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나꼼수’ 측이 지금까지 보인 반응은,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방송과 방송인이라고 보기엔 민망할 정도로 책임을 피해버리는 모습이었다. 아이가 엄마 치맛자락에 숨듯, 비키니 입고 응원해준 여성들의 사진을 방패 삼아 그 뒤에 숨어 침묵하는 것이다. 이 모습은 사실상 우리가 익히 보아왔고, 전형이 되어버린 진보 남성의 비겁함이다.
 
그래도 2012년이다. 진보 남성상(像)의 전형이 깨어지기를, 오랜 시간 진보 여성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다. 애정을 가지고 있기에 포기하지 않는다. 진보 정치를 꿈꾸고 논하는 남성들이 성의 정치, 삶의 정치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배울 마음을 먹게 된다면, 그것으로 이미 정치는 진보한 것이다. (2012년 1월 31일)

<일다>에 게재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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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3.15 14:48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2012.03.21 18:22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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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2. 소수자 집단의 ‘피해의식’ 어떻게 볼 것인가

일다와 함께 2011. 1. 14. 15:18
소수자 집단의 ‘피해의식’ 어떻게 볼 것인가
<조이여울의 기록> (2) 진단은 낙인이 되고, 원인은 답이 된다 
  
차별과 폭력, 사회적 소외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언론활동을 하다 보면 종종 ‘피해의식’이라는 용어를 접하게 되거나 떠올리게 된다.
 
개인차를 감안하고, 사회적 소외와 차별을 겪어 온 사람들이 그 결과로 피해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탓도 아니다.
 
문제는 피해의식이 사람들 간의 소통을 방해하고 상황을 쉽게 왜곡시킨다는 점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하여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거나, 자신과 처지가 다른 이들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등을 예로 들어보자. 이런 경우 피해의식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과 해당 주제에 관해 대화하는 건 불편한 일이 되고, 아예 ‘만남’ 자체를 꺼리게 되는 상황으로까지 갈 수도 있다.
 
때로 피해의식 혹은 그로 인한 배타성이 ‘집단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도 한다. 내가 보아온 바로는, 소수자 집단의 배타적인 성격이 그렇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인 이들에게 또 하나의 낙인이 되어 차별을 지탱해주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들여다보기 전엔 이해할 수 없는
 
작년 10월 재일조선인 선진유씨를 인터뷰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재일동포, 당신이 이야기할 시간입니다” <일다> 2010년 10월 20일) 도쿄로 떠나기 전 나는, 재일조선인 사회가 너무 “폐쇄적”이라 일본사회와 소통하며 상황을 개선해나갈 통로를 찾기 어렵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재일조선인 사회에 대한 나의 관심은 몇 년 전 내 또래인 림혜영, 조경희씨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커졌는데, 일본사회에서 재일조선인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대우를 받는지 듣고 깜짝 놀랐다. 그 정도일 줄이야. 천민집단 중에서도 천한 취급을 받아왔다면 설명이 될까?
 
한 번은 혜영씨가 지나는 말로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사람들 보라고 일부러 집을 깨끗하게 해놓는 경향이 있대요” 했다. 일본사회가 재일조선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조선 사람들은 지저분하다-을 반영한 얘기였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재일조선인의 삶은 사회의 편견과 낙인의 잣대에서 결코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코-카운셀러인 32세의 여성 선진유씨를 만나러 갔을 때, 나는 또 깜박하고 말았다.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의 삶이 어떠한지를 말이다. 나보다 좀 더 어린 세대라고 생각해서, 그새 일본사회도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었는지 모르겠다. 또는 마음수련을 해온 그녀의 맑은 표정을 보며, 공포에 시달렸던 지난 시절의 그림자를 읽어내기 어려웠던 탓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김없었다. 정리되지 않은 가해-피해의 역사, 전후에도 계속된 조선인학살, 규명되지 않은 폭력, 뿌리 깊은 인종차별,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는 불안감. 개인이 특유의 성격이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환경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진유씨는 어릴 적부터 자주 망상에 시달렸고 성인이 되어서도 조울증, 과민성대장증후군 등의 질환을 앓았다고 했다.
 
선진유씨의 고통스런 경험은 ‘개인의 문제’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 해결책도 ‘개인적인 수준’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자신을 둘러싼 사회는 문제 해결은커녕 이야기할 수 있는 여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 경험은 고스란히 개인의 몫이 되어 정신과 질환의 목록으로 나열될 뿐이었다.
 
진유씨는 학창시절 친구가 칼로 자신을 찌르는 꿈을 종종 꾸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공포에 대해 대화할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대학 사물놀이 동아리활동을 하며 무대에 올랐을 때, 관중 중에 누가 “너희는 조선인이냐?”라고 묻자 공포감에 그만 몸이 굳어버린 경험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다른 멤버들은 자기 태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일본인 친구들의 입장에서, 진유씨의 태도는 ‘피해의식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진유씨의 악몽에 대해 만약 그 친구가 알았더라면, 내가 왜 너를 죽이려 하겠냐며 불쾌감에 말도 섞기 싫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대에 오른 사물놀이패 멤버들도 대체 조선인이냐고 묻는 게 뭐가 대수라고 공연을 망치는지 답답해했을 것이다.
 
피해의식이란 이렇게 악순환 된다. 자신의 감정과 태도가 이해를 받지 못하니 더더욱 주위 사람들에 대해 신뢰를 잃게 되고, 그럴수록 사회와의 벽은 두터워지는 것이다.
 
‘비주류’라는 꼬리표를 단 사람들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개념으로 ‘결핍된’ ‘열등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의 경우에, 개인은 쉽게 ‘집단’으로 평가를 받는다. ‘비주류’라는 정체성이 꼬리표가 되어, 더 이상 개인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 꼬리표는 개인적으론 긍정적인 평가를 하려 노력한다 해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불명예스러운 이름이므로 개인의 일상에서도 크고 작은 갈등상황을 빚어낸다.
 
“미혼모”라고 불리는 집단, 혹은 “아줌마”라고 불리는 집단, 외국인노동자 집단, 가난한 나라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 동성애자 집단, 고아로 자란 사람들, 범죄자의 가족들, 특정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 고교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 천대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소수 종교를 믿는 사람들…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결핍되어 있다고 평가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꼬리표 떼기에 열중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거나, ‘나는 내가 속한 집단의 사람들과는 달라’ 이런 식으로 평가 받으려 노력하면서 말이다. 그 결과는 집단을 향한 사회적 차별에 동조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이를 테면 상당수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이름을 쓰면서, 조선인이란 걸 들킬까 전전긍긍하며 일본사람인 척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도쿄 신주쿠에 있는 한국-조선도서관 <문화센터 아리랑>의 부이사장인 송부자씨(72세, 여성)는 인터뷰에서, 자녀들이 괴롭힘 당하지 않게 하려고 매일 기모노를 입고 모피도 두른 채 학부모위원회 활동을 했었다고 회고했다. (“역사를 바로 가르칠 때 정의가 생겨난다” <일다> 2010년 7월 27일 박희정 기자)
 
또 어떤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자기 정체성의 꼬리표를 지탱하느라 힘겹다. 화살을 안으로 돌려 ‘더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해’, 혹은 ‘우린 이래서 안돼’, ‘저 사람은 우리 모두에게 망신이야’ 하고 자기 자신과 내부집단에 대해 검열과 가혹한 평가를 내리기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다수집단의 사람들은 고려조차 해보지 않았을 규정을 무수히 만들어, ‘평균에 못 미치는 존재’에게 사회가 부과하는 무게를 버텨내려 하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소외의 문제가 민족성이나 종교성과 관련이 있을 경우엔, 해당 집단의 여성들에게 부과되는 짐이 훨씬 커진다. 이 시대에 왜, 그것도 일본사회에서 공격 대상이 될 게 뻔한 상황에서 조선학교 여학생들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녀야 하는가. 소수민족들은 여자들이 관습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지 더 엄격하게 감시한다. 소수집단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여성들의 몸은 쉽게 통제 대상이 된다. 더 민족적이고 더 종교적이어야 한다.
 
흑인남성들은 흑인여성이 백인과 연애하거나 결혼하는 것에 대해 공공연히 분개한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연애에 왈가왈부할 일이 뭐 있으며 자존심 상할 이유가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밝힌 바, 실상은 흑인남성이 백인여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2배가량 높다고 한다.) 이런 시선이 있는 한, 흑인여성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의 결정에 대해 검열을 하게 마련이다. 우리 집단에 대해 ‘배신’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그런데 왜 개인이 이런 터무니없는 짐을 이고지고 가야 걸까. 왜 하루하루를 평화가 아닌 분쟁의 현장으로 삼으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다가가기 한 뼘이 아쉽다
 
나는 소수자 집단의 피해의식이나 폐쇄성, 혹은 배타성이 주제로 등장할 때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서 이 말이 떠오를 때에도 ‘한 뼘이 아쉽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 번 더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과 같이, 다가가는 한 뼘의 거리 말이다.
 
때로 어떤 이의 피해의식이 특정한 개인을 향한 원망으로 표출되어 보일지라도, 사실 그 원인은 사회적 기반과 지지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니 우리가 개인으로서 그 사람에게 잘못한 일은 없다 하더라도, 사회구성원인 개인으로서는 ‘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점에서 책임을 느낄 수는 있다는 이야기다.
 
만약 일본사회가 재일조선인 집단에 대해 “피해의식”에 절어 “폐쇄적(혹은 공격적)”이라고 평하고 있다면, 그러한 진단에 앞서 원인인 무엇인지를 확인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원인을 찾아내 교정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간편하게 진단만 내린다면, 그것은 낙인의 또 다른 양상일 뿐이다.
 
소수자 집단의 폐쇄성과 피해의식의 정도가 바로 그 집단이 속한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척도라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일본사회가 소수민족에 대해 너그럽고 관대한 문화였다면, 또 역사를 지배가 아닌 평화를 바라는 관점에서 교육했더라면 재일조선인 집단의 폐쇄적인 성격은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선진유씨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과 경험에 대해 “말할 기회”를 가져야 하고, 그것은 “절대적 안심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에서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의 인터뷰 기사 제목에 “당신이 이야기할 시간입니다” 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일본사회와 한국사회, ‘우리’가 들어야 할 시간이다. 재일조선인들의 권리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반일감정을 드러내는 것 외에, 우리와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재일조선인의 현실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이해하고 있었는가. 또 우리 사회의 소수자 집단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간혹 피해의식이나 배타성과 같은 소수자 집단 내부의 부정적인 일면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래서 안 돼, 저래서 안 돼’ 하며 상대적 우월감을 확인하는데 사용하는 대신, 그 원인이 되는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자세가 절실히 요청된다. 그 방법은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는 데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말이지, 한 번 듣게 되면 두 번 듣기는 훨씬 쉽다. 배경지식이 생겨 내 마음에 상대방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었으니까.
 
<일다> 2011년 1월 14일에 실림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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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1. 우리는 동등한 존재인가?

일다와 함께 2011. 1. 5. 14:21

경쟁사회에서 ‘평등’의 의미를 묻다
<조이여울 기록>(1) 우리는 동등한 존재인가?

외국에 나와 있으면 ‘국적’이나 ‘민족’이 나란 사람을 소개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한번은 여행객을 상대하는 상인이 “한국인이냐?” 묻더니 “빨리빨리!”라고 말하며 인사하는 보았다. 힌두인은 “나마스테” 일본인은 “곤니치와”인데, 한국인은 “안녕하세요”가 아닌 “빨리빨리”라니, 이 상인이 한국사람을 좀 아나 보다 싶었다.

남인도의 덥고 습한 날씨 탓인지, 이곳 사람들은 남녀노소 해가 쨍쨍한 낮 시간 내내 낮잠을 자거나 나무그늘 아래에서 아이들과 함께 쉰다. 상점이나 식당 문은 10시가 넘어야 열리는데, 1시부터 4시까지 휴식을 취하니 결국 일하는 시간은 오전에 잠깐, 그리고 오후 해질녘의 잠깐이다. 물론 여기서 ‘잠깐’이라는 표현은 한국사람인 나의 기준에 맞춘 것이다.

외국에서 한인 집단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열심히 일한다’를 넘어서 ‘악착같이 일한다’는 것이고, 한국사회가 ‘바쁘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이가 별로 없을 것 같다. 혹자는 한국의 노동력이 그만큼 질이 좋은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실로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행복한 삶과 비추어보았을 땐 어떠할까.

나는 외국에서 듣는 이 “빨리빨리”라는 우리말이 ‘발 동동’이라는 의미로 들려와 자조 섞인 웃음이 나왔다. 한국사회를 하나의 캐릭터로 이미지화한다면,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발 동동 구르는 모습이 떠오른다. 심지어 이것을 한국 현대사회가 에너지 동력으로 삼아온 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빠르다라는 개념에는 늘 ‘남보다’라는 혹은 ‘전보다’라는 비교가 들어가 있다. 비교 대상이 없으면 빠른 것은 없으니까. 더욱이 순위를 매기는 일이 일상적이고, 우열을 나누는 일이 자연스러운 경쟁사회일수록 그러한 종류의 ‘비교’는 그 중요도가 매우 높아진다. 뛰어나다거나 한심하다거나, 해냈다거나 실패했다거나, 성장했다거나 후퇴했다거나, 예쁘다거나 못났다거나 등등의 평가가 너무나도 자주 주어져 우리의 일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등한 인간 존엄성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이제 나는 이 문제를 내가 인생의 화두로 삼아온, 인류의 오래된 주제인 ‘평등’과 관련 지어 생각해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인도처럼 카스트 제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나면서부터 주어진다는 동등한 존엄성을 깨닫기가 결코 쉽지 않은 사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평등이라는 개념을 본질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사람들 사이에는 비교적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성향 혹은 형상과 가치들이 있다. 그 기준에 어떤 이들은 좀더 부합해 보이고 어떤 이들은 좀 덜 부합해 보인다. 선호하는 가치와 동떨어져 보이는 이들도 있다.

비교는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이를 테면 직장에서 어떤 기준도 없이 구인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보다 많은 이들이 동의할 만한, 일명 “타당한 기준”을 가지고 인사 관리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평등에 가깝다고 본다. 그럴수록 ‘능력’ 중심이라는 가치가 중요해지고, 배움이나 경험 유무 그리고 똑똑한가 순발력이 있는가 등의 요소들이 크게 작용하게 될 것이다. 건강을 비롯해 직장생활 원만히 할 성격으로 보이는지에 대한 여부까지 포함하여.

업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더 평가해주고 그에 따른 보상을 준다고 해서, 그것이 부당한 대우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성과에 대한 평가와 보상이 따르지 않을 때 불공평하다고 얘기될 것이다. 능력에 따른 평가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합법적일 뿐 아니라, 인맥 위주의 사회시스템이 앞으로 변화해나가야 할 방향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불편한 사실이 있는데, 쉽게 간과해버리는 점이기도 하니 이 기회에 굳이 꺼내어 이야기해보려 한다. 생존이 걸려 있는 이 무대가 누구에겐 쉽고 누구에겐 어렵다는 사실 말이다.

모든 것까지는 아니어도 많은 것을 잘 해내는 팔방미인이 있는가 하면, 무엇을 해도 남들보다 제대로 못해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다. 집중하여 일하기엔 건강이 따라주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학습장애가 있어 사회화가 어려운 이들에겐, 염색체나 두뇌의 문제로 타인과 소통을 못하는 사람들에겐 공평하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일까. 동등한 인간의 존엄을 느끼게 해주는 순간은 어떤 때이며, 평등이란 어떤 의미일까.

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 미성년자로서 법적 보호를 받는다는 것, 투표권을 갖는 것, 성인이 되면 술을 마실 수도 있다는 것, 또는 재활치료나 활동보조인의 사용이 허용된다는 것? 제도와 법이 보장하는 평등이란, 그것이 매우 중요하고 아직 한참 덜 채워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커 보인다. 인간은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세상에서 인정 받기를 바라고 만족을 얻길 바라며 사랑을 원하는 존재임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공적인 장에서가 아니라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성격이나 외모의 비교는 또 어떤가. 어떤 이들은 인기가 좋아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어떤 이들은 ‘비호감’이라며 타인들이 기피한다. 그것은 평등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혹은 없을까?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따뜻하고 호의적인 인간관계를 어떤 이는 비교적 쉽게 얻는 것 같고 어떤 이는 얻기가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과연 인간관계 속에서 개개인이 동등하게 인정 받는 인간 존엄성을 어떤 식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 괜찮은 세상이라면…

Canon | MP250 series | 2010:09:10 14:56:12

일다 그림작가 시로의 작품 "경쟁"

나는 이전에도 페미니즘, 소수자의 인권과 같이 ‘평등’이라는 개념과 뗄 수 없는 가치에 대해 생각할 때, 이처럼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여러 가지 형태로 되풀이 고민해보곤 했었다. 한 번은 동료인 윤정은 기자가 평화를 지향하는 외국의 한 대안공동체의 규정에 대해 들려주었는데, 이런 고민의 연장선에서 논의해볼 수 있는 예시였다.

그 공동체에서는 구성원들 간에 비판을 하는 것도 지양할 뿐 아니라, 칭찬을 하는 것 역시 좋지 않다며 자제하도록 하는 규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칭찬을 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인정을 한다는 것인데, 그건 다른 누군가에 대해선 인정하지 않거나 최소한 그보단 덜 인정한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월감이나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으로, 그러한 감정을 유발하는 것은 평화로운 공동체를 훼방하는 요소라고 보는 것이다.

아이들을 키울 때에도 과연 칭찬을 하지 않고 교육이 가능할까? 하는 현실성에 있어서의 의문이 들긴 하였으나,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동의하고 있는 내용-사람을 비교하지 말라-이 평화로운 삶에 필수 요소임을 부정하긴 어려웠다. 사실 타인을 인정한다는 것은 칭찬을 받는 이뿐 아니라 칭찬하는 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 정치적 행위이다.

모두가 똑같이 인정을 받는다면 ‘인정을 받는다’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좋은 평가든 나쁜 평가든 언제나 ‘남보다’라는 비교가 선행된다. 비교는 쉽게 우열을 낳게 되는데, 우열이라는 것은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안타깝게도 혹은 비극적으로 인간의 비교본능, 경쟁본능은 날 적부터 자리잡고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많은 사랑을 줘도 언니 혹은 동생과 비교하여 사랑을 덜 받았다고 느끼면 깊숙한 곳에 불만을 품게 되고, 풍요롭게 사는 듯 보여도 더 잘 사는 친구와 비교해 자신의 환경에 불평을 늘어놓는 아이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거기에 어른들과 사회가 더욱 합세해 비교를 조장하고, 경쟁을 앞장서서 가르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어릴 적에 나는 부모님에게 주위어른들이 “요즘은 딸 키우는 게 열 아들 안 부럽다”거나 “딸을 키우면 비행기를 타게 된다” 등의 얘기를 인사처럼 하는 걸 종종 보았다.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다. 딸만 가진 부부에게 주는 일종의 위로의 말이니까 말이다. 당시 나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고 자신했으므로, 우리 가족은 행복한데 왜 어른들은 저런 옹색한 이야기를 하는 걸까 싶었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무의식 중에선 행여 아버지가 아들이 없음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있는지 살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것은 아주 가벼운 예일 뿐이다. 옛날부터 “아비 없이 키우니 더 엄격하게” 자식을 훈육하는 어머니의 사례는 미담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엄격하게” 라는 말의 구체적인 행위로는 매를 때렸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실상 그 “더 엄격하게” 라는 것이 어떤 ‘결핍’의 상태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선 자식도, 어머니도 잘 알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내로 태어나지 못했으니 남의 집 아들 부럽지 않게 부모를 만족시켜야 한다거나, 공부를 못하니 운동을 뛰어나게 잘해야 한다거나, 입양 된 아이니까 착하게 굴어야 한다거나, 엄마가 가난한 나라에서 왔으니 보란 듯 성공해야 한다거나, 장애가 있으니 성격이라도 고와야 한다거나, 불 품 없이 생겼으니 애교를 키워야 한다거나, 독신으로 살 거면 사회적 지위가 높아야 한다거나, 동성애 커플이니까 더 낭만적인 사랑을 지속해야 한다거나 등등.

자신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괜찮은” 세상이었다면 가지고 있지 않았을 의무감, 부담감, 열등감이라는 감정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시달리고 있다. 자신이 처한 불리한 위치를 극복하며 삶의 동력으로 삼는 이들도 물론 있겠지만,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인정받지 못할 때 부자연스러움과 억압감을 내면화하게 마련이다. 그 심리적인 여파는 평생을 지배하는 것으로 심리학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비교의 중요도 낮추기, 경쟁을 지양하기

경쟁사회에서 인간이 자신과 타인이 동등하다는 것을 ‘실재로’ 알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과 누군가를 비교하며 우열을 평가하게 되는 순간, 동등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은 크게 흔들린다.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가슴 속에 인류애 대신 인간에 대한 회의와 분노를 키우게 된다.

인간 세상엔 ‘절대’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기에 비교가 필연적이고 경쟁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우리가 우열을 나누거나 등수를 매기는 시스템에서 변화를 꾀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인간의 기본권인 평등, 그리고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인간 존엄성의 회복을 위해.

이를 테면 학교에서 시험을 없애지는 않더라도 성적의 중요도를 낮출 수는 있는 것이다. 지금은 오로지 성적에만 모든 중요도가 부과되어 있지 않은가. 직장에서 학벌의 중요도를 낮추거나, 어떤 특정한 재능에만 더 가치를 높이 두지 않거나, 매스미디어가 부와 성공에 대해 크게 칭송하지 않거나, 지역사회가 다양한 개개인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주는 것, 그리고 썩어나가도 좋은 큰 파이 대신 분배에 더 신경을 쓰는 정책을 펴는 것도 당연히 효과가 클 것이다.


무엇보다 수시로 비교가 일어나는 우리의 마음에 대해 당장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랑과 인정을 먹고 자라는 어린 아이들에게 “네가 최고야”, “너는 특별해” 라고 말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 좋아, 너의 존재가 나를 기쁘게 해. 그렇지만 특별할 건 없어. 사람들의 가치는 모두 동등하니까.” 하는 자세로 대해주어야 더 교육적인 것 아닐까? 치열한 경쟁 때문에 친구도 없다는 요즘 학생들에게 “성적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너희에게 식성의 차이가 있는 것보다 더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일러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우열을 가르는 일이 너무나도 익숙한 나머지, 그것이 평등이라는 인간의 기본권을 훼손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조차 갖지 못하고 사는 게 아닐까 싶다. 분별하고 평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다시피 한 나로서도, 인간의 존엄함과 신 앞에 동등한 존재로서의 ‘우리’를 생각하며 더 넓은 마음의 창이 열리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쓴다.

<일다> 2011년 1월 4일에 실림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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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노동의 정치학

자유 게시판 2009. 2. 17. 11:05

2009년 "희망이 사라져 버린 시대"에 다시금 1968년을 읽고 있다. 삼인에서 출간한 <1968 :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을 보면, 저자 중 한 사람인 타리크 알리는 이 책을 집필하던 1998년 당시 머리글에 이렇게 썼다.

오늘날 1968년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그 세계는 가라앉은 대륙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세계에, 자조와 이기주의가 평등한 세계에 대한 믿음을 대체해 버린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 그러나 인류에게는 여전히 체제의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머리글 "권위에 의문을 제기한 시기
작가 수잔 왓킨스와 영화제작자 타리크 알리는 "정치적, 사회적, 성적 금기 등 모든 금기가 도전받고 깨뜨려진 시기", "전세계의 모든 세대에게 흔적을 남긴 해"였던 1968년의 기록을 모아, "정치적 달력"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책이다.

당시 간행된 급진적 성향의 잡지 표지들, 정치만평과 시사칼럼, 각국 반전시위대의 모습, 동파키스탄 여학생들의 맨발 침묵시위, 언론에 공개된 체 게바라의 시신, 베트남전에 지친 미군병사들 사진, 초기 여성해방운동 포스터, 빠리 시내 벽에 쓰여진 낙서, 아프리카 속담과 흑인민요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들이 망라되어 있다.

그중엔 반전운동가이거나 신좌파인 여성들이 운동 과정에서 여성이 담당하는 역할에 대해 검토하기 시작하는 모습도 소개되는데, 운동사회 내 가부장제 논란은 현재 한국사회에서도 지속적인 논쟁 거리라는 점에서 흥미롭게 보았다. 사실 20~30년간이나 문제제기가 있어왔지만,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도 그 연장선에 있지 아니한가.

평등한 사회를 꿈꾸던 당시 여성들의 글 중에서 "가사 노동의 정치학"을 옮겨본다.

[가사 노동의 정치학]

그것은 완전히 합당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 둘은 모두 직업이 있었다. 그런데 왜 가사 노동을 분담하면 안 되는가? 나는 내 배우자에게 가사 노동을 분담하자고 제의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동의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너무 유식해서 당신의 제안을 거절할 것이다. 따라서 몇 년 동안 대화가 계속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사 노동을 분담하는 것을 싫어하는 게 아냐. 하지만 내가 그걸 잘할 수 없잖아. 각자 자기가 제일 잘하는 걸 해야 해."
이것은 불행하게도 이런 의미다. 나는 접시를 닦는 일이나 요리에는 소질이 없어. 내가 잘하는 일은 목공일이나 전구를 갈아 끼우는 일, 가구의 위치를 옮기는 일이야. (그런데 당신은 얼마나 자주 가구의 위치를 옮기지?)

이것은 또 이런 의미다. 나는 단조롭고 시시하고 따분한 일은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까 당신이 그런 일을 해야 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사 노동을 분담하는 것을 싫어하는 게 아냐. 그렇지만 그것은 어떻게 하는지 그 방법을 나에게 보여줘야 할 거야."
이것은 이런 의미다. 나는 묻고 싶은 게 많아. 그리고 당신은 내가 그것을 할 때마다 시범을 보여줘야 해. 나는 잘 기억하지 못하니까 말이야. 그리고 내가 내 일을 할 동안 앉아 있거나 독서를 하려고 하지마. 당신 혼자 그 일을 하는 게 낫다고 느낄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당신을 성가시게 만들 테니까.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예전에 '우리'는 행복했었는데." (그가 일을 할 차례가 될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이것은 이런 의미다. 예전에 '나'는 행복했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그 일이야. 너무 신경 쓰지 마."
이것은 이런 의미다. 가사 노동은 별 볼 일 없는 일이야. 그것은 내 품위를 떨어뜨리고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어. 그러나 당신의 품위를 떨어뜨리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건 아냐.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성 해방은 진정한 정치운동이 아니야."
이것은 이런 의미다. 혁명이 아주 집 가까운 곳에 와 있다는 것.


팻 메이너디(Pat Mainardi)
레드스타킹즈 그룹 (Redstockings Group)
뉴욕,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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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장, 여성의 지위 어떻게 변했나

일다와 함께 2008. 5. 23. 04:44
노동시장, 여성의 지위 어떻게 변했나
[5주년 특별기획] 여성주의 시대진단②
 

여초(女超) 현상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남성교원할당제를 도입하려는 움직임과 더불어 ‘초등교원 여초현상’이 사회적 “문제”로 거론된 것을 비롯해, 사법고시와 행정고시 등에서 여성합격자의 비율이 절반을 넘어선 것에 대한 매체의 관심도 유달랐다. 대기업 임원급 여성 수가 증가한 것에 대해, 여성의 승진을 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인 ‘유리천정’이 무너졌다고 진단하는 이도 있다.

 
그렇다면 노동시장의 문은 여성에게 얼마나 열려있는가. 여성들은 평등하게 일할 권리를 누리고 있는 걸까. 한국사회에서 여성노동자의 지위는 변화했을까.
 
공교롭게도 KTX여승무원, 기륭전자, 이랜드로 대표되는 여성노동사안들은 당사자들의 적극적인 저항과 사회적 지지여론에도 불구하고, 수년째 해결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발이 묶여있다. 비정규직과 파견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 단결권 억압, 여성들이 다수인 직무에 대한 성차별 통념과 불법파견, 비정규직법 시행 이후 외주화 확산 문제는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다.
 
과연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지위는 얼마나 변화했는지, 여성노동의 현 주소를 찾아가보자.
 
법제도 바뀌었는데 현실은 왜?
 
▲ [변한 것과 변치 않은 것]     © 박희정
“소수의 여성들이 상위 고위직으로 들어가고 있는 게 눈에 보이는 측면이 있습니다. 여성의 고시합격비율이 높아지는 것 같은. (사람들은) 뭔가 큰 변화가 있는 것 같다고 여기는데, 상당히 소수죠.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의 전반적인 지위는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고 체감합니다.” (정형옥)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의 전반적인 지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지표가 있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50.2% 정도에 그친다. 20년 전인 1987년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당시에 비해 5%밖에 증가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여성임금은 남성의 67.8%에 불과해 무려 30% 이상 격차가 있다. 이 같은 지표들을 토대로 보았을 때에도, 노동시장 내 여성의 지위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정형옥(성공회대 여성학 강사)씨는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지위가 여전히 낮은데도 불구하고, 갈수록 “차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한다. 차별이 교묘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별로 직무를 분리하는 방식이다.

작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국가인권위원회의 용역을 받아 연구한 ‘유통업계 여성비정규직 인권상황’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놓여있는 여성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 한가운데 ‘성별직무분리’가 놓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통서비스업 내의 20개 업무 중에서 남녀의 비중이 40~60%인 “중립” 직무는 3개에 불과해, 결국 대다수 업무가 ‘남성의 일’, ‘여성의 일’로 나뉘어 있었다. 실태조사를 진행한 연구팀은 “현장의 노동자들이 ‘성별 격차’를 대단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그것은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성별의 노동자 즉 “비교의 대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정형옥씨는 “여성들이 받는 불이익을 이야기하려면, 누구에 비해서 불이익 받는지 비교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성별로 직무를 분리해버려서 여성들과 유사한 일을 하는 남성들이 없기 때문에 불이익에 대해서도 비교하기 어렵게 된다”고 설명했다. 성별로 직무를 분리하는 방식은 성차별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있으면서도, 여성들이 성차별에 대해 문제제기하기는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남자의 일, 여자의 일’
  아직도
 
▲ 철도공사의 불법파견으로 비롯된 KTX승무원들의 투쟁은 한국노동시장의 성차별 문제의 양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성별 직무분리는 유통업계만 아니라 금융 쪽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2006년 증권노조 여성위원회가 진행한 ‘증권산업 여성비정규고용실태조사’에서도 성별직무분리가 임금과 고용형태, 승진 등에서 여성노동자와 남성노동자의 격차를 심각하게 벌어지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당시 실태조사를 진행했던 정희선(현 전국운수산업노조)씨는 “단일하게 한 가지 차별만이 존재하면 문제의식을 갖기가 더 쉬운데, 복합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면서 특히 ‘고졸여성, 대졸남성’과 같이 성별 직무분리가 학력과 결합되어 마치 “(차별이 아닌) 당연한 신분이자 자격”처럼 되어버렸다고 지적했다.
 
정희선씨는 특히 ‘왜 지금도 남자의 일, 여자의 일이 구분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철도공사의 경우에 기관사는 거의 다 남자들이죠. 지하철이나 전기 쪽도 여성이 별로 없고. 만약 여자기관사가 뽑혔다 하면 그게 미담이 되고, 인생 성공기가 되고, 이슈가 되죠. 당연한 일이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항공 쪽 조종사들도 거의 여자가 없죠.”
 
‘남자의 일’이라고 인식되는 일자리들이 많을수록 그만큼 여성들의 취업은 제한을 받게 된다. 정희선씨는 “주요 공기업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여성의 경우 아주 엘리트들만 본사 관리직으로는 몇 들어갈 순 있을 텐데, 일종의 양극화라고 봐야죠. 관리직에만 소수 뽑고, 기술직이라든가 아래로 내려가면 전혀 없는 현상이 나타나는 거에요. 통념적으로 대학졸업장 필요 없는 안정적인 직업들, 직종들엔 여자들이 갈 수가 없어요. 대신 콜센터 같은 데로 가게 되는 거죠.”
 
“당연히 남자의 일”이라고 인식되기 때문에, 여성들은 아예 처음부터 구직을 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는 점도 악순환을 지속시키는 한 요인이 된다. 정희선씨는 “노동조합도 이제 ‘채용’의 문제에 대해 개입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노동조합이) 여성고용이나 장애인고용과 같은 이슈를 새로 개발해서, 성별로 구분되어 있는 지금의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데 아직 인식이 없는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도 교육이 되고 캠페인이 되지 않으면 남자의 일은 앞으로도 계속 남자의 일이 되겠죠.”
 
일하는 엄마의 삶의 질은 개선되었을까

 
빈순아(전국여성노조 정책국장)씨는 아이를 키우는 여성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보육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있으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지위가 나아질 수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선거 때도 노동공약 자체를 별로 얘기한 바가 없는데, 그나마 공약을 내놓은 것이 보육이죠. 보육은 책임지겠다는 둥 큰소리 쳤지만 피부로 와 닿는 변화가 없어요.”
 
빈순아씨는 어린이집이 지역마다, 국가가 관리하는 형태로, 저렴하게 누구나 아이를 보낼 수 있도록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저소득층의 경우엔 보육료 감면혜택이 있지만, 밤에 일하는 사람들이나 한부모 여성의 경우엔 아직도 보육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보육이 여자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여전히 다수의 여성들이 보육을 떠안고 있는 현실이잖아요. 아이를 믿고 맡길 수만 있다면, 여성의 노동력은 상당히 달라질 것입니다.”
 
공보육 강화와 더불어, 여성노조는 현안으로 ‘성별 임금격차’ 문제를 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임금은 왜 그렇게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일까. 성별 임금격차 문제는 여성의 빈곤과 경제적 자립 문제와도 직결되는 사안이다. 그러나 정작 “성별 임금격차에 대한 데이터나 연구가 별로 많지 않다”고 한다.
 
“같은 시간 일하는데도 왜 성별 임금격차가 크게 나는 것인지, 연구를 통해 상세하고 구체적인 원인을 분석해보려 합니다. 이를 토대로 여성운동 내부에서 바꿀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보자고 활동의 방향을 잡았습니다.”
 
여성노동의 이원화, 소외된 여성들에게 ‘초점을’

 
▲ 저임금, 높은 노동강도,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간병인
한편, 저임금 노동자의 비중은 여성이 훨씬 높은 상황이지만, 일부 여성들 중에는 전문직을 가지고 자신의 생애경력 관리를 하는 층이 생겨난 것에 대해 여성노동시장이 “이원화”되었다고 분석하며 여성들 간 격차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은수미(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씨는 “(여성들 중에) 남녀고용평등법의 효과라고 보여지는 일부 ‘개선된’ 층이 있다”면서, 반면 저임금을 받으며 시간이 지나면 더욱 더 열악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여성들은 제도적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갈수록 여성노동시장이 양극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제도적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여성노동자들은 간병인, 도우미, 청소용역, 백화점 판매원과 같은 서비스직, 100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100만원 미만 월 소득을 받는 여성들이 이에 해당한다. 사회보장제도에서도 비껴가 있고, 경력관리가 되지 않으며, 건강이 악화되고,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임금이 줄어들고 고용불안에 떠는 여성들.
 
은수미씨는 저임금을 받는 여성노동자들과 비정규노동자들의 심각한 노동현실에 비해, 여성운동이나 시민단체들 내부에서 이러한 사안에 관심을 가지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움직임은 너무 미약한 것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했다.
 
“남녀고용평등 정책과 적극적 조치 등이 어떤 여성들에게 효과가 있고, 어떤 여성들에게는 효과가 없었는지 모니터링을 해봐야 할 때입니다. 명확하게 혜택을 받지 못한 층에 대해서는 새로운 대책이 만들어져야 하고, 다른 방식으로 접근을 해야 합니다. 초점을 옮겨야 하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선 실태조사부터 시작해야 할 단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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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5 [11:59]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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