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5.03.01 여성운동사에서 3.1운동의 위치
  2. 2015.03.01 3.1운동과 비폭력 정신
  3. 2015.03.01 십대 여성들의 3.1운동

여성운동사에서 3.1운동의 위치

일다와 함께 2015. 3. 1. 11:44

3.1운동은 한국여성들의 첫 사회운동
[특집] 3.1운동의 역사적 가치와 유산④ 

 

<여성주의 저널 일다> 조이여울 편집장 (2013년 3월 19일)

 
‘3.1운동’과 ‘유관순 열사’는 마치 동의어처럼 짝으로 따라다닌다. 16세 나이에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감옥에 갇히고, 모진 고문을 받다가 17세에 옥사한 유관순은 “민족의 누이”, “독립운동의 꽃”으로 상징화되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 중 3.1운동을 ‘십대여성들이 주체가 된 독립운동’으로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오히려 당시에 보도활동을 한 외국인 저널리스트가 “3.1운동에서 여성들, 특히 어린 여성들의 역할이 가장 눈에 띄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번 3.1절을 맞이해 총 4회에 걸쳐 3.1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여성사로서 당시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① 십대여성들의 3.1운동
② 독립투사였던 기생들
③ 3.1운동과 비폭력 정신
④ 여성운동사에서 3.1운동의 위치

 

‘여성들이 정치의 영역으로 나온 최초의 시기’
 
33.1운동이 일어났던 당대는 유교문화가 지배적이고 남녀가 유별하며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접할 기회가 없던 시절이었다. 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정절’과 ‘순종’이던 사회에서, 어린 여학생들이 3.1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시위대를 지휘하고 비밀결사모임을 조직했던 역사는 한국 여성운동사에서도 큰 의의를 갖는다.

 

▲ 서대문형무소 1930년대 전경. 1919년 3.1운동으로 수감자가 급격히 증가하자, 일제는 서대문감옥 기존 건물을 신축해 수용인원 3천여 명 규모의 대규모 감옥으로 운용하였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3.1운동과 독립운동에 대한 최근 역사기록에서 여성의 주체성이나 활약상, 여성참여의 의미를 살려내고 있는 문헌은 많지 않다. 여성학계에서도 여성운동사로서 3.1운동을 조명하는 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의 여성운동사에 대한 기록에서 3.1운동을 주요하게 언급하고 있는 소중한 옛 자료들을 발굴해보자.
 
1928년 1월 6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조선여성운동의 사적고찰”이라는 제목의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삼일운동 전체가 조선인민 전부에게 많은 정치적 의식을 환기한 것은 물론이지만은 조선신진여성으로서 정치적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이 때를 최초라고 하야도 과언이 아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사는 3.1운동 이전의 여성운동사상으로 여자교육사상과 ‘신여성’ 그리고 기독교 사상을 들고 있는데, 그 영역이 정치적 영역이 아니라 생활영역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매우 국한되어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에 반해 3.1운동은 여성의 정치의식이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이후 조선여성들이 이 계단을 통해 광범위한 영역으로 진출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3.1운동 시기를 ‘여성운동의 제1기’라고 분류한다.
 
“삼일운동 이전의 소수 소위 신진여성의 사상은 오직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들의 활동은 오직 여자교육사상의 선전 교육기관의 설치였다. 그들의 시야는 그 이상 넓지 못하였다. (…) 여자의 생활영역은 지극히 국한되어 있었다. 비교적 일찍 깨었다던 기독교인도 그 종교의 권외에 일보를 나서보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제 관계에 대하여 삼일운동 이후의 조선민족운동은 분명히 많은 변화를 주었다. 신진여성의 의식을 발전시켜서 광범하여지도록 하였다. 여성의 정치의식이 이때로부터 발전하게 되었다.” -견원생(鵑園生)
 
여필종부, 삼종지도…낡은 봉건의 속박을 풀다
 
1967년 출간된 『이화팔십년사(梨花八十年史)』에서도 3.1운동을 계기로 변화하게 된 여성의 지위와 사회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여학생들의 활동이 여성의 해방과 지위를 향상시켰으며 나아가 사회적, 정치적 활동에 남성과 같이 참여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필종부니 삼종지도이니 하는 낡아빠진 봉건제도가 조국 비상사태에 임해서 배운 여성들을 안방구석에 묶어놓을 힘도 없도록 시대는 변하고 사태는 급격했던 것이다. 3.1운동 때 여학생들은 대부분 생명을 걸고 일선에 나서기를 서슴지 않았으며 이런 활동은 여성을 봉건제도와 남성들의 이중 속박에서 늦추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이화팔십년사』에서는 3.1운동을 거치며 우리 사회가 지독한 봉건제에서 벗어나 여성이 인간으로 인정받는 단계로 지위가 급격하게 향상되었으며, “여성이 자유를 누리게 되는 서곡이 울리기 시작”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성의 사회 진출과 평등의식 확산돼
 
1971년 정요섭(1926-2005) 숙명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집필한 『한국여성운동사: 일제치하의 민족운동을 중심으로』에서, 저자는 3.1운동을 “한국여성들이 최초로 전개한 사회운동”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여성운동에서의 위치를 자리매김하고 있다.
 
정요섭 교수는 1919년 2월 동경여자유학생들의 국권회복을 위한 역할과 3.1운동 전야의 준비단계부터 시위행진에 참여하고 희생한 여성들의 역할을 주목하며, “이로부터 여성의 사회참여는 공인되고 따라서 여성교육의 이념도 평등을 지향하여 진일보하였다”고 평한다.
 
집안에서 순종의 미덕만을 닦아왔던 우리나라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면서 이후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민족운동, 여성 근대화 운동을 벌이게 한 계기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3.1운동은 여성의 사회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고 이로부터 여성의 지위향상이 비롯되고 있다. 그리하여 1920년대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각 방면에서 여성의 사회적인 자아실현이 결실되는 시기로 접어드는 것이다.”
 
정요섭 교수는 3.1운동 이후 조직된 여성단체가 1927년까지 70,80개를 헤아리게 되었다고 기록하며, 이후 1920년대 근우회(1927~1931) 등의 여성단체운동과 연결고리를 잇는다.
 
한국의 여성운동은 독립운동과정 속에서 성장
 
1980년에 3.1운동60주년 기념사업으로 ‘3.1 여성동지회’가 펴낸 『한국여성독립운동사: 3.1운동 60주년기념』에서도 여성항일운동가 고인 67인과 생존자 40인의 업적을 소개하며, 3.1운동을 여성이 사회적으로 진출하게 된 계기이자 첫 사회운동으로서 주목하고 있다.
 
‘3.1여성동지회’ 명예회장인 박용옥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1996년 출간한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에서 3.1운동에 대해 서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성장한 한국 여성운동의 초석으로서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 나라의 여성운동은 서방국가의 경우와는 달리 주로 항일민족독립운동의 추진과정 속에서 발전했다. 그러므로 일제하 여성항일운동은 근대적 한국 여성상 정립의 필수적인 요체였다.”
 
박용옥 교수는 3.1만세운동 직후인 4월 중국 상해에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정부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임시정부가 발표한 민주헌법에 “남녀평등”이 명문화되어 있었다는 점을 부각한다.
 
“임시정부는 국내외의 전 민족의 뜻을 모아 세운 것인 만큼 남녀평등은 전 민족의 의지라고 해석할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에 이를 지지하고 후원하기 위하여 국내외의 많은 비밀단체들이 조직되고 활동했는데, 여성들도 상해와 평양, 서울 등 각지에서 많은 조직을 만들어 독립운동, 근대화 운동, 교육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기록들은 3.1운동 당시 여성들의 참여를 한국의 여성운동사 흐름에서 자리매김하며, ‘정치적 무대’에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하게 등장한 서막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시, 유관순을 기리며 

▲ '유관순굴'이라 불리는, 유관순이 순국한 여성옥사(지하감방)을 복원해놓은 곳. 허리를 펼 수도 없는 독감방 4개가 붙어있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천안 아오내 장터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고, 법정에서 ‘남의 나라를 침략한 일본의 법관에게 재판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강력히 항의하면서 재판장에게 호통을 치며 거부권을 행사한 이화학당의 유관순(1902-1920)은 3.1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항일운동의 상징으로 기념되고 있다.
 
당시 16세의 유관순은 원심에서 3년 형을 받았지만 법정모욕죄가 덧붙여져 7년형이 언도되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일제가 독립운동가 여성들을 수감하고 고문하기 위해 신축한 여성옥사(지하감방)를 복원해놓고 있다. 여성옥사에는 허리를 펼 수도 없는, 1평도 채 안 되는 독감방 4개가 붙어있다. 여기가 바로 유관순이 온갖 고문과 악형으로 순국한 장소로, 일명 ‘유관순굴’이라고 불린다.
 
추계 최은희 기자의 기록에 따르면, 유관순은 16세의 미성년임에도 워낙 중형인 까닭에 청의를 입히지 않고 황토빛깔 수의를 입혔으며, 혹독한 형벌을 당하여 온 몸이 성한 데가 없이 되어 중병환자와 같았다.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1920년 3월 1일에 3.1운동 1주년을 맞아 감옥 안에서도 수감자들을 일깨워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9월 28일, 17세의 나이로 옥사하기까지 숨이 붙어있는 한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며 국권의 회복을 부르짖었다.
 
남녀노소가 참여한 ‘범국민 운동’이라는 키워드는 3.1운동이라는 역사의 현장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있다. 3.1운동의 역사에서 ‘성별 분리’와 ‘연령 차별’, ‘사회적 신분’이라는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어 일제의 가혹한 성적 탄압 앞에 비폭력 시위를 주도하고 저항했던 여성들의 용기와 정신은 반드시 기억되고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억과 해석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3.1운동이라는 역사적 사실의 실체에 전보다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또한 3.1운동의 의미 역시 폭을 넓혀 새롭게 인식할 수 있고, 현재에 다시 불러내올 수 있는 정신적 유산이자 살아있는 영감으로서 여성사를 가질 수 있게 된다. ▣ 조이여울 (여성주의 저널 일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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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비폭력 정신

일다와 함께 2015. 3. 1. 11:36

3.1운동과 비폭력 정신
[특집] 3.1운동의 역사적 가치와 유산③ 

 

<여성주의 저널 일다> 조이여울 편집장 (2013년 3월 13일)

 
‘3.1운동’과 ‘유관순 열사’는 마치 동의어처럼 짝으로 따라다닌다. 16세 나이에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감옥에 갇히고, 모진 고문을 받다가 17세에 옥사한 유관순은 “민족의 누이”, “독립운동의 꽃”으로 상징화되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 중 3.1운동을 ‘십대여성들이 주체가 된 독립운동’으로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오히려 당시에 보도활동을 한 외국인 저널리스트가 “3.1운동에서 여성들, 특히 어린 여성들의 역할이 가장 눈에 띄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번 3.1절을 맞이해 총 4회에 걸쳐 3.1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여성사로서 당시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① 십대여성들의 3.1운동
② 독립투사였던 기생들
③ 3.1운동과 비폭력 정신
④ 여성운동사에서 3.1운동의 위치

 

여성시위자에 대한 일제의 성적(性的) 탄압
 
3.1운동은 비폭력 시위로 전개되었으며, 시위주동자와 참가자들은 무장한 일본 경찰들 앞에서 태극기 한 장을 들고 맨몸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저항했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복원한 고문실    © 일다 -이옥임

 

한국민의 비폭력 저항에 대한 일제의 대응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자행되었다. 특히 여성들에 대해서는 성적 학대와 고문을 통해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진압했다.
 
“10세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들과 아녀자들, 그리고 여학생들이 자기의 조국을 위해 정열을 발산하고 독립을 외쳤다는 단순한 죄목으로 치욕적인 대우를 받았고 체형을 받았으며 또 고문을 당했다. 어린 소녀들은 고꾸라지고 잔혹하게 얻어맞았다.” (Frederick Arthur Mckenzie, 1920)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 기자는 『한국의 독립운동』에서 3.1운동에 위협을 느낀 일본인들은 “제멋대로” 칼을 휘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맥켄지 기자는 일본 제국 정부가 고문을 하지 못하도록 성문화된 법규를 제정했지만 실상은 고문을 용납하고 있으며, 아직 공판에 회부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대대적인 고문을 가하고 있다고 고발하면서, 일제가 즐겨 쓴 고문 형식을 나열했다.
 
1. 여학생과 젊은 여인들의 옷을 벗기고 두들기고, 발로 차며 채찍질하고 또 욕을 보이는 일.
2. 학생들에 대해서 죽도록 채찍질을 한 일.
3. 불에 태우는 일, 즉 담배불로 어린 소녀들의 연한 살을 지지고, 또 불에 달군 쇠로 남자건 아녀자건 할 것 없이 이들의 살을 태운 일.
4. 엄지손가락에 끈을 매어 달아 매고 대나무와 쇠몽둥이로 때리다가, 의식을 잃으면 다시 깨워서 이런 일을 되풀이하는데, 이런 고문은 어떤 때는 하루에도 여러 번, 또 어떤 때는 죽을 때까지 계속한 일.
5. 고통이 극에 이르도록 사람을 헝겊으로 감아 조이는 일.
6. 고문 상태로 오랜 기간 감금시키는 일. 이를테면, 남녀를 한 방에 빽빽이 집어넣어서 며칠이든 쭉 피고 눕거나 앉을 수가 없는 일.
 
맥켄지는 이러한 고문이 외딴 지역에서 지위를 남용한 이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많은 도시에서, 그리고 또 많은 사람에게 가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경찰들이 여성들의 만세시위 기세를 꺾기 위해 공개된 장소에서 성고문을 가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던 당대 여성들을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억압한 것이다.
 
“대부분의 경찰서에서는 시위에 조금이라도 가담했으면, 여학생과 젊은 부녀자들의 옷을 벗이고 때리고 완전히 알몸으로 만들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일본 남자들 앞에 노출시키는 것이 예사였다. 한국 여자들은 백인 여자들처럼 자기의 몸을 남에게 보이기를 싫어하는데, 일본인들은 이것을 알고, 이런 방법으로 욕보이기를 좋아했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복원한 벽관.  간신히 한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는 좁은 공간이다.   ©일다 
 
당시 국내외 언론들에 보도된 기사들에서도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에게 가해진 폭력과 고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여성들은 체포되면 거리에서 옷을 벗기고 일본 헌병들이 보이는 곳에 세우고 희롱…” 「대한독립신문」
“나체로 만들어 발로 걷어차고 유방은 소에 대하는 듯이 쥐어짠다” 「북경 데일리뉴스」
“포박된 조선부인과 여학생들에 대한 학대에 대해 일일이 지면에 싣고 싶지만 기재할 수 없다” 「재팬 크로니클」
“고통이 길게 가도록 간격을 두고 태형을 가하며 옷을 입으라는 명령이 내렸을 때는 수족이 이미 마비돼 움직일 수 없는 상태” 「차이나 프레스」
 
시위주동자로 형을 확정 받아 감옥에 수감된 여성들에게는 한층 더 악랄한 성적 학대가 가해졌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기록에는 “(일제가) 자주 사용한 고문법으로 ‘소좆몽둥이’(소의 생식기를 뽑아 말린 것)를 물에 불려 여성 음부에 삽입했다”고 되어있다. 또한 여성들의 팔을 자른 사례들도 전시돼있다.
 
멕켄지 기자는 남자들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은 “여학생으로서 죽기보다 싫은 것 같았다”고 기록하며, 종로경찰서에 끌려간 여학생들로부터 얘기를 들은 한 미국인 여성이 자신에게 해준 말을 옮겨 적었다.
 
"그 여학생들이 한 얘기를 모두 당신 같은 남자분에게 말할 수는 없어요. 이것만은 말씀 드리겠어요. 여학생들이 팔을 잘리기도 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만약 이 여학생들이 내 딸들이라면, 나로서는 종로서에서 그러한 일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팔이 잘리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비폭력’ 원칙에 입각한 평화운동
 
성적 박해와 폭행,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성들-여학생, 교사, 가정주부, 기생-들은 집밖으로, 학교 밖으로 뛰쳐나와 3.1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많은 비밀모임을 조직하고, 외국의 평화운동가들에게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3.1운동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며 마하트마 간디에 의해 1917년 시작된 인도의 비폭력 저항운동 ‘사티아그라하’(산스크리트어로 ‘진리를 지킨다’는 뜻)와 더불어, 세계사적으로 기록될만한 범민족적인 비폭력 평화운동이다.
 
평화적인 한국민의 만세시위를 일본 제국 경찰들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하고 학살하였지만, 3.1운동은 무기를 들지 않고 맨몸으로 저항하는 비폭력 원칙을 고수한 채 전국적인 물결을 이루었다.
 
시위 과정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집결하여 일본 경찰서를 점거하거나 헌병들을 제압하거나, 반일감정으로 국내에 체류 중인 일본인들을 해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한국민들은 결코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3.1운동은 시위였지, 폭동은 아니었다. 첫날 이래 폭행은 조금도 없었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일본인들 중에 다친 사람은 없었으며, 일본인 상점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Frederick Arthur Mckenzie, 1920)
 
경찰이 습격하고 칼을 휘두를 때에도 3.1운동의 지도자들은 힘으로 저항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타민족과 타국가를 점령하여 평화를 깨뜨린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한국민들이 방식은 평화를 지키는 것, 즉 ‘평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비폭력 투쟁이 어떤 무장투쟁보다 더 용감하고 급진적인 투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시구문. 일제강점기에 사형 집행 후 그 사실을 은폐해야 할 경우, 외부로 몰래 반출하기 위해 뚫어 놓은 비밀 통로.  © 일다
 
3.1운동을 통한 비폭력 저항은 한국민들의 정신적 힘과 의지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 보여주었으며, 이를 지켜보는 바깥의 시민들-세계인들은 커다란 감흥을 받았다.
 
맥켄지 기자는 『한국의 독립운동』 필자 서문에서 대한민국의 평화적인 항일의거에 대해 깊은 경의를 표하며, 한국민족성에 대해 세계가 재평가하기를 촉구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정치인들로부터 무기력하고 비겁하다는 별명과 딱지가 붙어오던 한 나라가 이제 아주 높은 수준의 영웅심을 발휘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무기도, 아무런 방어 수단도 없이 버티었던 것이다. 그들은 미리 폭력을 쓰지 않기로 굳게 맹세했다. 자기네의 운명이 선인들이 당했던 것과 꼭 같은 고문, 즉 토르케마다(스페인 최초의 종교 재판소장)와 그 일당이 행했던 것과 같은 교묘한 여러 가지 고문을 당하리라는 생각은 충분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예상했던 온갖 것, 즉 억눌리고 짓밟히는 온갖 고통을 견뎌내야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감옥에 끌려가면, 다른 이들이 대신 그들 자리에 들어섰고, 이들이 끌려가면 또 다른 이들이 그들의 일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도 만약에 문명세계의 항의가 일본의 행동을 중단시키지 못할 경우엔, 더 많은 사람이 이 무서운 행렬에 가담할 태세를 지금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한국민족성에 대하여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이전에 내렸던 그 평가가 잘못되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 민족이 이제 다시 새롭게 탄생하였다는 것은 명백한 일인 것 같다. 어느 편이 정말 정당한 설명일까? 양편이 다 옳을는지도 모른다.”
 
3.1운동 당시 어린 여성들이 일본 경찰들에 의해 폭행과 성고문이 마구잡이로 자행되는 가운데에서도 만세시위를 그치지 않았고, 감옥에서 나온 여학생이 “나는 이 모든 악형을 나라를 위하여 당하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수치도 아픔도 이길 수 있었다”고 말하는 등의 광경을 목도한 선교사 게일(Gale)도 한국민의 의지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제의 탄압을 기록한 보고서에서 “남자라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어린 여학생들이 용케도 감당했노라”고 칭송하였고, 서양인들은 흔히 한국인을 비겁한 민족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어느 민족역사에도 이처럼 용감하고 떳떳한 민족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고 적었다.
 
무자비한 폭력으로 제압하는 일본 경찰 앞에 무기를 들지 않고 맨몸으로 맞섰으며, 다수가 집결하였다 하여 일본인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던 ‘비폭력 정신’은 3.1운동을 여성사로서 복원하면서 다시 새겨보아야 할 우리 역사의 유산이자 가치이다. ▣ 조이여울 (여성주의 저널 일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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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여성들의 3.1운동

일다와 함께 2015. 3. 1. 00:40

십대 여성들의 3.1운동
[특집] 3.1운동의 역사적 가치와 유산①

 

<여성주의 저널 일다> 조이여울 편집장 (2013년 2월 28일)

 
‘3.1운동’과 ‘유관순 열사’는 마치 동의어처럼 짝으로 따라다닌다. 16세 나이에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감옥에 갇히고, 모진 고문을 받다가 17세에 옥사한 유관순은 “민족의 누이”, “독립운동의 꽃”으로 상징화되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 중 3.1운동을 ‘십대여성들이 주체가 된 독립운동’으로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오히려 당시에 보도활동을 한 외국인 저널리스트가 “3.1운동에서 여성들, 특히 어린 여성들의 역할이 가장 눈에 띄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번 3.1절을 맞이해 총 4회에 걸쳐 3.1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여성사로서 당시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① 십대여성들의 3.1운동
② 독립투사였던 기생들
③ 비폭력 원칙을 끝까지 지키다
④ 여성운동사에서 3.1운동의 위치

 
“3.1운동의 가장 특이한 현상은 여성들의 역할”
 

3.1운동에서 ‘여성의 주체성’을 키워드로 읽어내는 작업은 무리한 것이 아니다. 당시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외국인 저널리스트는 3.1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주요하게 포착하고 있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가장 특이한 현상은 여성들의 역할이었다. 약 20년 전만 해도 외국인 남자는 한국에 여러 해를 살아도 여자를 접촉해 볼 기회가 전혀 없었으며 거리에서도 만날 수 없었고, 한국인 친구의 가정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Frederick Arthur Mckenzie, 1920)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1869~1931)는 캐나다의 퀘벡에서 태어난 스코틀랜드계의 영국인으로, 영국 언론 「데일리 메일」의 아시아특파원으로 활동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뛰어난 저널리스트였던 맥켄지는 한국민들은 “한일합병”(韓日合拼條約, 1910)을 원치 않는다는 메시지를 세계에 전하였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이 한국민의 여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그는 3.1운동의 현장에서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1920년에 320페이지에 달하는 저서 『한국의 독립운동 (Korea's Fight for Freedom)』을 집필하였다. 이 책은 사회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저널리스트의 시선과, 평화를 지향하는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조명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맥켄지는 한국민들이 전국적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투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들이 일본의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을 비판하며, 의미심장한 경고를 하였다. 지금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을 견제하지 않으면 30년 내에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서양국가 중 가장 큰 부담을 질 나라는 미국일 것이라는 예견이다. 그의 경고는 현실이 되어, 일본의 진주만 공습(1941)으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게 된다.
 
이처럼 아시아와의 상황과 세계정세를 통찰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기술한 저술에서, 맥켄지는 3.1운동에 대해 여성들, 특히 어린 여성들의 역할이 가장 눈에 띄었다고 쓰고 있다.
 
“전에 나는 한국인 상류 가정에서 한두 주일을 지낸 일이 있으나, 그 부인이나 딸들은 한 번도 볼 기회가 없었다.”
 
약 20년 전 한국에 왔을 때에는 거리에서, 심지어 한국인 친구의 가정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여자들이 국권회복을 위한 3.1만세시위에 앞장서서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분석에는 당시 유교 문화권인 한국의 시대상이 깔려있다. 여자가 있어야 하는 곳은 집안이고, 집밖의 세상은 남자들의 영역이었다. 20년간의 큰 변화가 있다면, 여학교가 설립되어 소녀들 중에서도 배움의 기회를 갖게 된 이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맥켄지는 한국에 기독교 교육과 신식 생활방식이 들어오면서, 젊은 여성들이 열심히 새로운 생활 방식을 채택하여 재래식 생활 장벽이 허물어지게 된 것으로 분석하였다.
 
자와할랄 네루 “코리아에서 어린 여학생들이 항일투쟁”
 

1971년 출간된 『한국여성운동사: 일제치하의 민족운동을 중심으로』에서 저자인 정요섭은 당시 교육받은 한국여성들은 일제의 교육정책이나 전통적인 여성관이 제시하는 여성상에 반하여 사회적인 각성과 지위 향상을 추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당시 일제의 한국여성에 대한 교육정책은 '황국여성'을 만드는 전초작업으로 일본은 철저한 복종형 여성상을 여성의 이상으로 제시하였다. 즉 일제는 한국여성에 대한 교육정책을 ‘특히 정숙 온량한 덕을 함양함을 요한다’는 미명 아래 무조건 복종하는 교육을 강요함으로써 근대 여성교육의 지향에 퇴보를 초래케 하였다. 그러나 당시 교육받은 한국여성의 교육관은 현모양처의 범주를 훨씬 넘어서는 단계에서 여성교육의 이상을 추구하였다.”
 
여학교가 설립되어 소녀들도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당대는 남녀가 유별하고 내외하며, 딸들은 아버지의 허락 없이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고, 여성에게 정치와 사회에 대한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여자는 정조를 지켜야 하고 남에게 함부로 몸을 보여서도 안 된다는 성규범이 지배적인 사회였다.

 

▲ 광주3·1만세운동기념동상.  이 동상은 수피아여중고 교정에 있다.  © 출처- 독립기념관 
 
그런 가운데 어린 여성들, 특히 공립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은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조직하였으며, ‘국권회복을 위해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투철한 사회적 신념을 가지고 3.1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1996년 발간된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에서 저자 박용옥은 이들 소녀들의 3.1운동에 대해, 일제의 강경한 진압으로 남자들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오히려 여성들이 용감하게 준비하고 실행함으로써 군중들을 시위운동으로 이끌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에는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하여 인도 민족운동을 전개했던 자와할랄 네루(Jawaharal Nehru; 1889~1964)가 여섯 번째 투옥되었을 때, 16세의 딸 인디라(Indira Gandhi; 1917~1984)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한국 소녀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도 인용되어 있다.
 
“일본의 한일합방 통치는 인류역사에서 가장 참담하고 비통한 것인데, 그 코리아에서 어린 여학생들이 항일민족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네가 알면 너도 마음이 끌릴 것으로 안다.”
 
“여학생이 시작했다”, “여성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만세시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1919년 3월 보도된 신문들의 단신 사건 보도기사들을 통해서도, 여성들이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19년 3월 「매일신보」를 장식하고 있는 기사들은 서울을 비롯한 평양, 개성, 진주, 목포 등지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진 것을 짤막하게 사건 보도로 전하고 있다.
 
‘여학생이 시작했다’, ‘여성들의 소요’, ‘여학생의 음모’, ‘진주 – 기생이 앞서서’, ‘구마산 - 여자가 많았다’… 등의 제목과 기사 내용이 곳곳에 눈에 띄어, 전국 방방곳곳에서 여성들이 항일운동을 주도했음을 말해준다.
 
“개성에서는 3월 3일 오후 2시에 만세성이 터졌다. 그런데 개성에서의 시위는 그 준비와 거사 거행이 모두 여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3.1운동 60주년을 맞이하여 1980년에 ‘3.1 여성동지회’가 펴낸 『한국여성독립운동사: 3.1운동 60주년기념』은 전국 시.도별로 거행된 여성들의 만세운동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를 주도한 인물들의 이름도 살펴볼 수 있다.
 
서울 경성여고보의 최은희, 배화여고보의 김정애, 숙명여고보의 황현순, 이화여학교의 신마실라, 정신여학교의 김마리아, 진명여학교의 나혜석… 그리고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그 유명한 아오내 장터 시위를 이끌었던 유관순, 개성 지역의 만세운동에 불을 지핀 어윤희∙이경지 자매, 평양의 안정석∙박현숙, 대구의 이순애, 부산의 주경애 등이 역사에 남은 이름들이다.
 
그러나 『이화팔십년사(梨花八十年史)』에 “주동자로 몰려 투옥되고 검거된 학생들의 명단과 참여자 여부는 현재 알 길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이름 없는 수많은 여학생들과 교사, 여성종교인들이 전국에서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을 것임에 분명하다.
 
학교 밖 여성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 이름도, 흔적도 남지 않아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3.1운동의 주역으로 나서거나 투쟁하였으며 박해를 받았는지 위와 같은 기록들을 통해 가늠해볼 뿐이다.
 
일본경찰이 찾는 배후조종자는 없었다
 

맥켄지 기자가 주목하였듯이, 3.1운동을 조직화하여 펼친 주역으로서 십대 여학생들의 역할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한국의 독립운동』에는 “전국에서 여학생들이 가장 활발했던 곳은 서울이었다. 예를 들어, 3월 5일 수요일 아침에 경찰에 잡힌 사람들의 경우를 보자. 그들은 거의 다 여학교 학생들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여성운동사: 일제치하의 민족운동을 중심으로』를 집필한 정요섭은 1만여 명의 여학생들이 시위에 가담했을 것으로 추산한다.
 
당시 일본경찰은 어린 여학생들이 이끈 만세시위를 누군가 뒤에서 기획하고 지도하였으리라 여기고, 학생들을 검거하고 심문하면서 배후조종자를 찾아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배후에 있는 것은 여학생 당사자들의 의지와 신념뿐이었다.
 
오히려 여학생들은 교사들이나 어른들에게 해를 미칠까 염려하여, 학생들끼리 비밀회동을 하고 만세시위를 기획하였다. 미션스쿨에서는 여학생들이 미국인 교사들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전원이 자퇴서를 내고 시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한 여학생 중 한 사람인 저널리스트 최은희가 후일 집필한 『한국 근대 여성사 (상)』편에는, 십대소녀들이 어떤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어떻게 투쟁하였는지 당사자들과 지인들의 회고와 증언을 모아 수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목포 정명여학교 재학생인 14세의 소녀 김정애는, 헌병에 에워싸여 경찰서로 검속되어 가는 과정에 기수가 되어 앞장섰으며 “왜 우리들이 선생님 조종을 받지 않고는 못 나온단 말이에요. 일본 사람들은 어른만 애국심이 있고 아이들은 애국심이 없는 식충이들만 산다는 이야긴가요. 조선 사람은 삼척동자도 나라를 사랑할 줄 알아요. 우리들은 벌써 14,15세의 장성한 처녀들이에요.” 라고 말했다.
 
3월 3일 개성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서 주모자로 검거된 이들은 호수돈여고보 학생들이었다. 징역 2년 형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한 어윤희는 경찰의 심문에 “새벽이 되면 누가 시켜서 닭이 웁디까? 우리는 독립할 때가 왔으니까 궐기를 하는 것이지요.” 라고 말했다.
 
유관순, ‘민족’이 아닌 십대여성들의 상징으로

 

▲ 천안 유관순열사 동상  ©출처: 유관순열사기념관 
 
3.1운동을 기억하고 그 의의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아버지의 권유에 따른 것도 선생님의 지도를 받은 것도 아닌, 십대소녀들이 주체가 되어 독립운동을 기획하고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역사의 현장을 되살려보는 것은 현재의 시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3.1 운동이 일어난 지 90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 유관순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이는 거의 없다. 후대의 역사 기록을 통해 유관순은 “민족의 누이”이자 “독립운동의 꽃”으로 상징화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 이름은 소수 앞서나간 “민족의 누이”가 아니라, 3.1 운동의 주체가 된 수많은 여성들-특히 십대여성들, 여학생들, 소녀들-의 상징으로 읽혀야 한다. 더 나아가 기생들과 가정주부들, 백정의 아낙들을 포함하여 당대 비폭력 저항운동을 펼친 여성들의 상징으로서 “유관순들”로 새롭게 읽혀야 할 것이다.
 
만약 1919년 한반도 전역에서 물결쳤던 3.1운동의 현장을 ‘한국의 소녀들이 주체가 된 비폭력 저항’으로 역사가 기억하고 있었다면, 2008년 광우병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의 불씨를 지핀 한국의 십대여성들의 존재가 낯설고 놀랍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 조이여울 (여성주의 저널 일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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