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2.04.14 기록14. 어떤 선거운동
  2. 2011.12.15 예비법조인들에게 하고픈 이야기
  3. 2011.05.18 기록11. 오월의 기억 그리고 기념
  4. 2010.01.16 대안매체로서 일다의 성장(인터뷰) (2)
  5. 2009.05.25 ▶◀ 그는 왜 우리의 대통령이었을까 (2)
  6. 2009.02.16 "민주주의의 정의에 대한 하나의 의문"

기록14. 어떤 선거운동

일다와 함께 2012. 4. 14. 15:50

박혜령, 그가 만드는 ‘더 많은 민주주의’
<조이여울의 記錄>(14) 어떤 선거운동 
 
“우리는 장사를 하니까 표출을 잘 못해요. 안타깝죠. 먹고 살아야 되니까. 매스컴 타는 자체가 왜 싫겠어요? 좋기야 좋죠. 내가 하고 싶은 말 다부지게 하고. 근데 시선이 따가워요. 원래는 그런 게 없어야 하는데. 요즘은 공무원들도 다 내림이잖아. 어느 줄을 서느냐 이런 거에 따라 달라지니까. 어쩔 수 없이 내 양심 속이고 줄을 서야만 하는.” (울진의 한 시장에서 만난 여성유권자)
 
“박혜령 후보님, 저는 예전에 핵 폐기장 반대운동 했었던 OOO입니다. 이번 선거에 출마하시는 거 보고, 당연히 도와드렸어야 하는데… 제가 △△△에서 일하고 있어서, 대놓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마음으로 지지합니다.” (영덕의 한 식당에서 만난 남성유권자)
 
4.11 총선에서 경북 영양.영덕.봉화.울진군 지역구에 출마한 녹색당 박혜령 후보를 지지하러 7일과 8일 양일간 선거운동을 함께했다. 기자로서 동행한 것이 아니라, 선거운동원으로 정식 등록을 하고 지역곳곳을 돌며 유권자들과 만난 1박2일은 무척 특별한 경험이었다. 드라마틱하게도, 박혜령 후보가 가는 곳마다 간증과도 같은 주민들의 고백을 접하게 되었다.
 
영덕의 귀농여성, 정치를 다시 사유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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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1 총선에서 경북 영양.영덕.봉화.울진군 지역구에 녹색당 후보로 출마한 여성농민 박혜령씨  
 
작년 10월, 영덕 핵발전소 반대운동에 연대를 호소하러 서울에 올라왔다가 시민들의 무관심에 눈물 흘리던 박혜령씨를 처음 본 이후 나는 줄곧 이 사람을 잊을 수 없었다.
 
몇 주 후 영덕으로 내려가 인터뷰를 청했을 때, 박혜령씨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산골로 귀농해 17년간 농사 지으며 살아오던 자신이, 핵발전소 반대운동에 앞장 서며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관련 기사: 에너지문제 “어쩔수 없다 말하지 마세요”)
 
비단 핵발전소 문제만이 아니었다. 지역사회에서 정부와 관공서가 어떻게 토건사업들을 밀어 부치는지, ‘당근과 채찍’ 전략으로 주민들의 입이 얼마나 가로막혀왔는지, 그 결과 ‘풀뿌리 민주주의’가 얼만큼 훼손되고 실종되었는지, 박혜령씨의 울음 섞인 말 속에 우리 지역사회의 암담한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 날의 만남을 인연으로 작년 12월부터 <일다>에 “박혜령의 숲에서 보낸 편지”가 연재를 시작했다. 개발과 성장, 물질과 성공을 쫓아 위험한 길을 내달려가는 한국사회에, ‘보다 나은 길이 있다’며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그의 편지는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건드렸다.
 
올해 2월 박혜령씨가 지역구 후보로 총선에 출마하기로 결정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전혀 놀라지 않았다. 해당 지역은 전형적인 새누리당 텃밭인데다가, 전 재산 2천만 원에 불과한 사람인데다가, 지역에서 함께 뛸 운동원이라고는 남편을 포함해 10명 남짓밖에 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어떤 ‘신호’였다. 박혜령씨는 정치에 대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사유하게 만든 인물이기 때문이다. 경쟁과 성공신화, 토건의 개발논리에 밀려 포기하도록 강요되어온 가치, 강자의 논리와 이윤 앞에 더 이상 윤리를 이야기하지 않는 사회, 차선도 아닌 ‘차악’을 말하는 정치판을 낯설게 보도록 만들어주었다.
 
몸살을 앓는 땅과 강과 바다의 시름을 보고 하늘이 도운 것인지, 그 사이 한국에도 녹색당이 창당해 박혜령씨는 무소속이 아닌 정당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전 처음 국회의원 선거운동에 참여해보고 싶다는 희망을 가졌다.
 
새누리당 텃밭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
 
선거일을 4일 앞둔 지난 7일, 울진군의회 앞에서 만난 박혜령 후보는 그 사이 눈에 띄게 마른 데다가 목소리도 쉰 상태였지만,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활기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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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진 후포항에서 유세 중인 박혜령 후보.  TV 토론회를 계기로 울진 주민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게되었다.  © 일다 
 

“울진에서는 핵발전소 이미 있는 거 어떻게 하겠냐, 그런 체념과 패배의식이 강하게 느껴져서 처음엔 여기 오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희망의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생활 속 한 귀퉁이에 핵발전소를 두고 사시는 분들이 심적 부담을 강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두려웠고요.”
 
그래서 ‘더 자주’ 울진에 왔다. 7일 울진시장 부근을 돌며 선거운동을 할 때, 주민들은 박 후보를 따뜻하게 반겼다.
 
울진 지역민들의 태도가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3월 28일 포항MBC 후보자 토론회에서, 박혜령 후보가 핵발전소 부근에서 살아가고 있는 울진주민들에게 배급된 방독면을 들고 나와, 사용기한 10년이 넘은 것임을 폭로하며 동시에 핵에 관한 긴장감을 일깨운 것.
 
“방송에서 울진 분들 이야기한 게 굉장히 큰 힘이 되었는지, 다음날부터 격하게 감정 드러내시면서 반가워하셨고, 함박웃음으로 만나주시기 시작했어요. 일명 ‘방독면 아지메’ 왔다고. 저를 울진주민으로 여겨주시는 것 같고, 너무 감사했어요. 핵 문제 관심 있는 분들은 다 공감하시고, 아이 키우는 젊은 부모들도 녹색당 이야기에 관심 많이 기울이고 계세요.”
 
울진 북면에 있는 핵발전소 지역을 다녀온 것은 더욱 자극이 되었다.
 
“핵발전소 안에서 일하시는 현장 노동자들을 만났어요. 너무 따뜻하게 맞이해주셔서 감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지역주민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본인들만 떨어져 딴 세상에서 살고 있고, 함부로 말을 섞지도 않고 얼굴이 굉장히 경직되어 있어서 가슴 아팠어요 우리가 현장 노동자들의 문제를 좀더 적극적으로 풀어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박혜령 후보는 가장 중요한 것은 “(유권자와) 눈빛을 마주치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방자치단체의 뜻과 반대되는 입장을 표명한다는 것 자체가 “주위 눈치를 살펴야 하는 일”이었던 지역 사회에, 선거운동을 통해 조금씩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이다.
 
“눈으로 서로 마음을 주고 받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그것만 되면 다 된다고 생각해요. 처음엔 주민들이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불안해하시는 게 느껴졌어요. 주위 살피시고. 지금은 그런 게 없어졌다는 게 엄청난 성과예요. (선거) 결과로 얼마나 드러날 지 알 수 없지만, (핵발전소 반대운동) 대책위 때와는 다른, 큰 성과물로 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울진, 영덕서 박혜령 후보와 함께한 축제
 
울진과 영덕 곳곳에서 진행된 선거운동은 서울, 대구, 인천 등 각지에서 온 녹색당원들이 함께했다. 다른 정당과는 달리 맞춤형 선거운동복도 없고, 차량과 음향과 각종 준비물을 손수 제작하는 등 ‘가난한’ 녹색당의 선거운동은 그렇기 때문에 어딜 가나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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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령 후보 선거운동을 도우려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녹색당 당원들은 방독면 퍼포먼스, 저어새 분장,  가면극 연출 등 다양한 퍼포먼스를 펼쳐 상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 일다 
 

운동원들은 녹색 바람개비를 가슴에 달아 휘날리면서, ‘기호 7번 박혜령, 정당투표는 11번 녹색당’을 알리는 각양각색 피켓을 들고 유권자에게 한 표를 부탁했다.
 
어떤 이는 박혜령 후보의 상징이 된 “방독면”을 설치미술로 제작했고, 직접 방독복을 만들어 입고 퍼포먼스를 펼치며 거리행진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멸종 위기종 ‘저어새’로 분장한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길 위의 대안학교’라 불리는 보따리학교 아이들도 바람개비를 날리며 “우리는 맑은 햇빛이 좋아요~”를 외쳤다. 
 

‘부네굿’의 장소익 연극인과, 유인촌 전 문광부 장관으로부터 해임을 당해 대법원에서 승소한 바 있는 김정헌 전 문화예술위원장 등 예술인들도 박혜령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울진시장은 작은 축제의 공간이 되었고, 상인들은 “재미있다”, “건전하다”, “기발하다”, “현대적이다” 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제는 무조건 하고 찍지 말고, 좀 바뀌어야 않겠나” 라며, 박혜령 후보 지지의사를 밝힌 상인 김정숙(47)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래낀가 농협 앞에서 (선거운동) 하시길래 좀 보고, 어떤 당인데 저렇게 하느냐, 처음엔 비례대표인 줄 알았거든요. 보니까 7번이시데요? 요즘은 인터넷 들어가면 다 알아볼 수 있으니까. 핵 반대운동, 농어촌 주민들 문제, 교육문제 이런 게 신뢰가 갔죠. 내만 생각하지 말고 후대를 위해서 투표해야 하잖아요. 여자로서 더 믿음이 가고, 진실도 있어 보이고.
 
이제는 어떤 걸 갖다 대도 ‘저 사람 말은 아니다’ 라는 걸 우리가 판단해야지, 이끌려 가서는 안 되잖아요. 그런 마음이에요. 후보자들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정확하게 찍자는 거죠. 겉만 보지 말고 깊숙이 속을 보면서. 이것 저것 견줘 보고. 저는 표 차이가 많이 나지 않고 갈랑갈랑하게 나는 그런 선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더 많은 민주주의’를 만드는 선거
 
민주주의는 엄청난 세금을 들여 선거를 치른다. 시민들은 투표에 참여하여 대표자를 뽑는다. 그래서 많은 경우 선거는 대표자들의 머리 수로 평가되곤 한다. 과연 그러한가? 그것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민주주의일까.

▲ 울진군 버스정류장에서 유세하는 박혜령 후보.  한 여성유권자가 다가와 농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정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꽤 오랜 시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 일다 
 

대표자가 바뀌어도 또 바뀌어도, 정권이 바뀌어도 또 바뀌어도, 지역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멀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스템의 한계에 자포자기하는 대신 ‘더 많은 민주주의’를 꿈꾸는 이들도 있다. 
 

선거의 과정을 통해 지역사회가 변화의 계기를 만들 수 있다면, 의석 하나 얻는 것보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만드는 정치적 성과를 얻은 것이리라.
 
“정책이나 제도를 통해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주민들의 문화를 통해서 만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정책과 제도는 뒷받침을 해주는 것이지요. 녹색당과 함께 만들어갈 겁니다. 저희는 이미 선거 이후를 준비하고 있고요. 어떻게 지역을 함께 만들어가야 할 지, 흥미롭고 재미있을 것 같아요”
 
박혜령 후보는 이미 선거 이후를 전망하고 있다. 열명 남짓한 인원으로 시작했던 반핵 운동이, 이제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게 되었고, 전국에서 힘을 모아주고 있기 때문에 “옛날처럼 슬프지만은 않다”고 한다.
 
“농사 짓는 분들과 앞으로 지역에 협동조합이나 여러 가지 자치활동 구상하고 있고요. 문화행사들, 청소년 교육프로그램, 다양한 기획이 나오고 있어요. 구체적으로는, 선거 사무실을 좀더 폭 넓은 주민들의 공간으로, 몇 평 되지 않지만 수만 명 주민들의 참여를 담아낼 수 있는 큰 그릇으로 만들어야겠다 하고 있습니다. 기대가 많아요.”
 
예전에 만났을 때 박혜령씨는 영덕이 주민들 사이에 ‘영 덕이 없는 도시’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척박한 곳이라고 했다. 이틀 전 만났을 때는 공약을 하듯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영원히 덕 있는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이여울 / 저널리스트, 미디어 <일다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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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법조인들에게 하고픈 이야기

일다와 함께 2011. 12. 15. 11:00


법조인의 ‘엘리트주의’와 법의 공정성

- 예비법조인들에게 하고픈 이야기

<사법연수원 인권법학회 학회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2011년 2월


사법연수원 인권법학회 여러분과 만난 지 어느덧 시간이 꽤 흘렀네요. 돌이켜 그 짧은 만남을 떠올려보면, 사법연수원의 독특한 분위기-사회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학교라고 하기도 뭐한-와 더불어 그 속에서 ‘배움’에 열려 있는 사람들의 눈빛이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인권법학회가 어떤 역할을 하는 곳인지 금방 알 수 있었지요.

1년간의 학회 활동을 정리하고 알리는 소식지에 자유로운 주제의 공간을 마련해주셨으니, 법조인이 아닌 사람들 중의 한 명으로서 법조인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여러분께 해보려 합니다.

나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호의를 가지게 된 법조인들이 몇 분 있습니다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법조인 집단에 대해 그리 좋은 평을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우스개로, ‘변호사 백 명이 한강에 빠지면 강은 더러워지지만 나라는 깨끗해진다’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의’ 실현과 관련 있어야 할 집단이 돈에 양심을 팔면, 그 악영향이 크다는 이야기를 풍자하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정계나 재계의 실세, 또는 지역 유지 등에 얽힌 권력비리에는 검사들이 연루되어 언급되는 경우가 계속 있어왔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검사집단에 대한 이미지는 ‘권력의 시녀’라는 오명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나는 그런 이미지와 실제 현실을 비교하면서 그 평가가 타당한지 그른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즉 주목 받는 집단으로서 법조인의 위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법조인도 직업인들이고, 직업에는 귀천이 없지요. 그러나 법조인들에 대해 우리 사회는 상당히 높은 대우를 해줍니다.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직업군에 해당하고, 사회지도층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때문에 이들 집단에 대한 풍자나 비판의 기저에는 부와 명예 혹은 권력을 ‘가진 자’를 향한 질시도 담겨있지만, 그만큼의 기대도 담겨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기본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고, 법조인의 양심이 우리 사회의 청렴도나 민주주의 성숙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람들 일반의 생각이 법조인에 대해 ‘특별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시선을 받는 위치에 놓인 법조인들의 태도와 삶은 과연 어떠할까 이 문제를 한 번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이 보내는 이 ‘특별한 시선’이라는 것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채워주는 듯 보이지만, 그런 시선에 장단 맞추다 보면 어느새 평상심을 잃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혼란스럽게 되기도 합니다. 개개인의 일상적 삶, 즉 내면과 사회적 지위나 역할, 즉 외면이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 그만큼 인간은 행복에서 멀어진다고 심리학에서는 말하지요.

이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엘리트주의를 경계했으면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는 강력한 엘리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들 내부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 엘리트주의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위험한 것이지요. 다른 집단과의 소통을 가로막고, 배움에 있어서도 닫혀있게 만들며, 세상을 좁게 사는 방식입니다. 물론 평등에도 위배되고 말이지요.

수년 전에 법정 취재를 갔다가 보았던 장면입니다. 아마도 성폭력 관련 사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날 법정에는 증언자가 여럿 있었습니다. 증언 순서가 미리 정해져 있었지요. 그런데 재판이 시작되자 갑자기 재판부가 순서를 변경했습니다. 마지막 차례였던 증인이 첫 순서로 증언을 하게 되었지요.

사람들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요. 그것은 그 증인이 대학교수라는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교수씩이나 되는 분이 법정에 출두했으니, 시간 절약하실 수 있도록 판사들이 배려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당사자인 증인을 비롯해 함께 갔던 일행과 법정을 나와서, 판사들의 엘리트주의는 정말 못 말리는 수준 같다며 그 원인 분석을 해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과연 학벌이나 사회적 신분에 따라 증언 순서를 바꾸는 재판부가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혹자는 개인의 가치관이나 태도가 법조인으로서의 역할과는 별 연관성이 없다는 듯, 객관적이고 공정한 법의 판단이 지식습득으로서 가능한 것처럼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디 실재가 그런가요? 법조인 개인의 가치관과 태도는 그의 사회적 역할 수행과도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언론인들도 마찬가지지요.

모 대학 출신자들 눈에는 해당 대학 출신자들밖에 뵈는 게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엔 신분제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사회생활을 해나가는데 있어 많은 경우 대학 인맥을 비롯해 비슷한 지위의 사람들 테두리 안에서 관계를 맺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학벌이 좋거나 학력이 높은 사람들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사람들에 대해선, 그 존재를 상상도 못했거나 그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불리한 이야기인지 유리한 이야기인지도 모른 채 변호인이나 검사의 심문에 끄달려 가는, 그러니까 “똑똑하지 못한” 사람들도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변호하지 못하는 사람들, 법정에서 그런 사람을 보면 그가 원고든 피고든 간에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사실 스스로를 변호할 줄 아는 사람들, 혹은 비싼 돈을 들여 승소율 높은 변호인을 고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 역시 기자생활을 하면서 보다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들, 사회를 통찰하는 눈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말과 글로 잘 풀어내는 사람들을 선호하게 됩니다. 또,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법정에서 똑 소리 나게 발언하는 당사자들이나, 용감하게 자신의 문제를 사회 이슈로 만들어 변화를 촉구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손을 잡고 춤이라도 추고 싶어지지요.

반면 그 반대의 경우는 선호하지 않게 되지요. 말 잘해주는 취재원이 필요하지, 설사 내용이 있다 하더라도 설명을 잘 못하거나, 간혹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길 하거나, 말 실수를 하는 사람에게는 신뢰를 보내기가 어렵지요. 우리는 직업상 말과 글이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의 긴 생애 중에서 잠깐 만나고 말뿐이니까요.

그러나 똑똑하지 못하고 의사소통이 어렵고 실수도 많은 바로 그 사람들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고, 사회적으로 관심을 더 받아야 할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법의 공정성, 언론의 공정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법조인과 언론인들이 자신의 눈높이를 조정하고 맞추어갈 (배워갈) 적극적인 태도를 지녀야 하는 것이겠지요.

이를 테면, 사람들이 별 것도 아닌 일로 소송을 벌이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판사들에겐 충분히 있을 수 있으나, 개개인의 일상을 전쟁과도 같은 상태로 몰고 가는 ‘소송’이란 것이 당사자들에겐 별 일이 아닐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검사를 만나고 온 이들은 ‘검사들 목 부러지겠다’ 이러지요. 거만한 태도로 사람을 내려다본다는 뜻입니다. 심문을 하는 검사의 역할상 기 싸움에 능해야 할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몸에 익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건과 성과만 보일 뿐이지요. 언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종에 목 매며 경쟁매체에 신경 쓰다 보면, 정작 중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물론 나는 법조인들 중에서 특히 ‘인권’을 생각하는 이들이 얼마나 관대하고 통합적인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엘리트주의 사회에서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들이 엘리트의식에서 스스로 해방되기란, 별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업무 스트레스가 많더라도, 법이 누구를 위해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잊지 않고 누구에게 공정하지 않은지, 누구에게 다가가지 못하는지, 나의 역할은 무엇일지 언제나 생각해주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앞으로도 늘 새로운 배움에 열려있어서, 삶을 배우고 세상을 배우는 일이 여러분의 평생의 과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조이여울
/ 저널리스트, 미디어 <일다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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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11. 오월의 기억 그리고 기념

일다와 함께 2011. 5. 18. 23:51
어머니의 배는 지금쯤 통증을 멈췄을까
<조이여울의 記錄>(11) 5.18 민주화 운동을 기리며 
 
어릴 적의 기억이다. 온 가족이 광주에서 해남으로 가는 관광버스를 타고 여행 길에 올랐다. 버스는 서너 대가 같은 방향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앞의 버스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휴게소에 정차하더니 줄줄이 1시간이나 지체하고 말았다. 승객들의 불만이 제기되었고, 그때 한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이래서 전라도는 안 된다니까.”
 
그러자 승객 중 또 다른 사람 몇몇이 그 말을 받아서, 잠시지만 버스 안은 정치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장이 되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전라도사람’들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당시 어른들의 ‘지역’이야기, ‘정치’이야기는 뜬금없었지만, 한편으로 뭔가 마음 아픈 것이 느껴졌다. 경상도에서 이런 일이 있었으면, 경상도사람들은 ‘이래서 경상도는 안 된다니까’ 하는 식의 자조 섞인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버스 연착 문제가 정치이야기로까지 비화될 일도 없었을 테고.
 
나의 친인척들이 포함되기도 한 ‘전라도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정치적인 이야기를 정말 많이 했다. 시국에 대해 할 말이 많았고, 정세에 관해 실제로 많은 정보들을 알고 있기도 했다. 때로 별 연관도 없는 것에 지역감정을 드러내는 경우엔, 피해의식이 합리적인 판단을 흐리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당시만해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빨갱이 폭도들의 난동’ 쯤으로, 많은 광주사람들의 죽음과 끔찍한 고통이 ‘유언비어’ 쯤으로 취급 받던 때였다. 전라도사람이 하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한 국가 안에서 철저히 매도되고 고립된 지역이 있었다는 것. 요즘처럼 스마트폰과 소셜 네트워크가 일반화되어 가는 때에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만, 사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그것은 당사자들에게, 해당 지역사람들에게는 어떤 경험이었을까. 그 ‘한’은 개개인의 내면에, 그리고 외부를 향해 어떤 식으로 표출되었을까.
 
광주 민주항쟁 20주년 즈음에 알게 된 한 대학생은 해마다 5월이 되면 자기 어머니는 배가 아프다고 하신다고 얘기했다. 자신을 임신해 만삭인 배로 5.18을 겪었던 어머니는,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어김없이 5월이면 그 해의 공포스러웠던 기억이 몸을 통해 재생된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접한 후로, 해마다 5월이면 나의 머리는 자동적으로 그녀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1980년 광주에서 태어난 아기는 서른이 넘었다.
 
이제는 대중들도, 그 해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관심만 가지면 정보를 접할 수 있다. 5.18은 폭동이 아닌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4.19혁명과 마찬가지로 달력에도 기념일로 기록되었다. 1990년대 후반 최초의 정권 교체와 사회의 변화는 분명 광주사람들, 그리고 전라도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겪었던 고립과 소외를 조금씩 회복시켜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나는 가끔씩 궁금해진다. 그 친구의 어머니의 배는 지금쯤 통증을 멈추었을까, 유가족들은 그 슬픔에 얼만큼 위로를 받았을까, 광주사람들은 ‘피해의식’ 혹은 ‘지역감정’이라 불릴만한 심리로부터 자유로워졌을까?
 
주로 ‘기념식’에 초점 맞춰지곤 하는 5.18은 단 몇 일간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봉인되었던 기억, 풀지 못한 실타래를 조금씩 매듭지어 고통스러운 경험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주어야 하는 몫이 우리에게 있다.
 
아마도 이 순간, 이 자리에서 5.18을 ‘기념’하는 개개인의 마음 속에 그 해답과 힘이 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반공이데올로기 앞장세워 정치를 해온 세력들이 고스란히 권력을 유지하고 있고, 선거 때마다 국민들은 전쟁과도 같은 희생을 치러 얻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쉽게 망각하곤 하지 않은가. 이것이 당시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야기하고 재생하는 움직임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일다> 2011년 5월 18일 실림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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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매체로서 일다의 성장(인터뷰)

일다와 함께 2010. 1. 16. 09:00

*일본 아시아_태평양 대학(Asia Pacific University) 학생이며, 현재 핀란드 University of Helsinki에서 "대안매체와 민주주의"(Alternative Media and Democracy)를 공부하는 교환학생과의 메일인터뷰

 

1) 대안매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자주 사용되는 *4가지 이론적 접근* 중에 어떠한 접근 방법이 <일다>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적합한지

 

*4가지 이론적 접근: Understanding Alternative media Theoretical Approaches *

1번째 접근 커뮤니티 공헌에 근거하는 대안매체: serving a community

2번째 접근 주류 미디어의 대안으로서의 대안매체: alternative to mainstream media

3번째 접근 시민 사회(사회운동)에 근거하는 대안매체: linking alternative media to civil society

4번째 접근 뿌리형태(그만큼 활동,내용의 범위에 있어서 제한이 적음)의 대안매체: alternative media as rhizome

 

<일다>는 "주류미디어에 대안으로서의 대안매체"에 해당하겠습니다이 부분에 대해서 2003년 5월 1일 <일다 창간사>를 참고하실 수 있겠고요<일다> 1주년 기념 간담회 "여성주의 언론의 가능성" 관련 보도기사(더 넓은 곳에일다의 시선미치길, 문이정민)와, 2주년을 기념하여 제가 썼던 편집장 칼럼(일다 2년 나기, 조이여울)도 살펴보시면 <일다의 저널리즘>과 관련한 정보가 될 것입니다.

 

, 5주년을 맞아서 축하의 글들을 기고 받았는데, 이중 언론의 속성을 잘 알고 계신 정민 선생님 글(연한 것은 강한 것보다 깊다)이 일다의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고 생각합니다.


2) 지난 6년간 대안매체로서 <일다>가 한국사회에 공헌한 것과, <일다>를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적 가치가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점.

 

한국은 식민지배와 (동족 간) 전쟁의 여파, 그리고 이어진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우대립' '흑백논리'가 현재까지도 사회를 장악하고 있다고 봅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높지만, 그것은 쉽게 이데올로기 대립이라는 틀 안에 갇히곤 했습니다. 좌냐 우냐의 기준 외에 다른 섬세한 잣대들이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나 할까요. 이런 상황에서, 한국사회엔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공간이 부족합니다. 다양성이라는 말은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일다>는 좌파매체냐 우파매체냐(주로 좌파매체로 분류되겠지요)의 단순한 이분법에 갇히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위태로운 줄타기'를 자청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바로 그 제3의 영역이 우리가 주목하는 '여성과 소수자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탈북자 인권'에 대한 관심이 그것입니다. 탈북자(재중동포와 새터민)들은 좌파진영에서 보았을 때 골칫거리입니다. 북한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존재이며, 이들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미국과 우익의 책략에 넘어가는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일다> 창간  시기만 해도 시민사회진영에서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반면 우익에서 보았을 때 탈북자는 북한을 비난하는 용도로, 쉽게 정치적 도구로 이용당해왔습니다.

 

<일다>에선 탈북자의 인권, 특히 탈북여성들의 존재를 알리고 이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보도를 해왔습니다. 존재 그 자체,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목하는 <일다>의 보도에 대해, 일각(좌파)에서 '여자 오마이인줄 알았더니 여자 조선일보였냐'는 식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는데 그것이 지금 좌-우대립에 갇힌 한국사회의 수준이라 할 것입니다.

 

역시 이와 관련하여 <일다 창간사>, 4주년 맞아 제가 쓴 칼럼 [저널리즘, 새로운 지평, 조이여울]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3) 대안매체를 제작, 운영하는 곳의 구조적 특징은 일반적인 회사구조와는 다르다고 알고 있는데, <일다>의 경우는 어떠한지.

 

<일다>는 재정의 한계가 뚜렷한 상황에서, 저널을 만들어가는 상근 인력은 저와 편집장 두 사람입니다. 올해에 새로운 사업을 준비하면서 두 명의 인력이 충원돼(그 중 한 분은 작년까지 기자로 일했던 분입니다총 네 사람이 일하고 있지만 여성주의 저널을 책임지는 사람은 둘입니다.

 

하지만 일다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훨씬 더 많지요. (만드는 사람들 참고) 운영위원, 편집위원과 고정 필자들, 통역-번역가, 독자위원들과 자문 주시는 분 등 여러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저는 창간 때부터 2007년까지 약 5년간 편집장을 맡았고, 2008년부터는 윤정은씨가 편집장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기자로 활동하고 있고요. 윤정은씨는 이라크에서 기록활동을 하고 돌아온 2005년에 <일다>와 만났고, 저널리스트로서 경험이 많은 분입니다. 3년간 <일다>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저와는 직책과 역할이 다를 뿐 동료관계로 <일다>운영에 함께해왔습니다. 윤정은 편집장 체계가 시작된 2008년부터, '저널'로서의(NGO가 아닌일다의 성격이 더욱 분명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한국회사의 분위기는 너무 관료적이지요. 틀에 박힌 상명하복 구조인데다가 나이주의, 학연과 지연, 남성들간의 돈독한 인맥쌓기로 대표할 수 있겠습니다. <일다>는 그러한 관료제 시스템과는 다른 구조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역할과 권한'이 다르더라도, '동료'로서 서로 존중해주는 문화가 필요하겠지요. 학연이나 지연, 인종, 나이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다만, 평등한 조직문화를 고민하는 그룹들이 빠지는 오류가 있다고 보는데요. "횡적인 관계를 중요시한다"는 것이 종종 '역할과 권한'을 불분명하게 하거나 혼동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초기부터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일다>에서도 그런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았다고 자부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4) 대안매체에 대해 가장 궁금한 점이 재정문제인데, 대안매체라는 타이틀과 현실적 조직의 관리 면에서 갈등하거나 힘든 점은.

 

재정적인 한계가 뚜렷했지요. <일다> '무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광고영업을 하지 않으니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독자들의 자발적인 구독료, 즉 후원금을 통해 운영해왔고, 적은 액수지만 컨텐츠 판매료나 1년 한두 번의 행사 수익 등이 기본 재정을 형성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언론사로서의 체계를 갖추기는 어려웠지요. <일다>의 특수한 상황을 이해해준 아름다운재단에서 2005년부터 2년간 재정지원(연간 약 13백만원)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사실 어떤 언론이든 광고영업을 하는 것은 '언론의 독립성' 면에나 저널리즘의 성격 면에서 제한요소, 또는 위험요소가 됩니다. 그러나 한국언론들은 광고수익에 의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일다>는 결국 자체 사업을 통해 자립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올해부터 체계를 정비하고(20명의 출자자가 모여 유한회사로 법인화했습니다. 초대 대표이사를 제가 맡았습니다) 내년부터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일다>가 추구하는 가치관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펼쳐보는 교육사업 정도가 되겠네요. 물론, 쉽지 않은 일을 또다시 벌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만큼 오기까지 정말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다>는 이제 7년이 되어갑니다. 젊다는 이유로, 이 매체를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돈도 없는데, 운영에 대한 마인드가 전혀 없이, 겁도 없이, 이상만 가지고 시작했으니까요. 여성주의 매체가 필요하다는 뜻을 공유하고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창간때나 마찬가지로, 지금도 인력을 충원할 재정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이제는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거친 시행착오들은 너무나 큰 힘이 되어주었고, 이제 미래를 위한 설계라는 것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창간 이후 줄곧 '운영'을 생각하면 어찌할 바 몰라 당혹스럽기만 했는데 말입니다. 일다 사람들은 이렇게 엄혹한 시절(뒤로 돌아가버린 민주주의 사회에서), 꿈을 꿉니다. 함께 꾸는 꿈이 현실이 될 것이라 믿으면서...


5)
<일다>는 대안매체의 중요성과 가치를 널리 알리는 책임감도 막중할 것이라 예상하는데, 앞으로 <일다>가 대안매체의 정착을 위해 학술적 연구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학계나, 학술적인 영역은 주요한 고려대상이 아니었습니다그러나 일다의 저널리즘에 대한 저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물론 하고 있습니다. 출판은 역시나 재정부담이 큰 지라, 현실화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듯합니다. (2009년 12월 이메일로 답변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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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 BlogIcon 트루디 2010.01.24 09:24 Modify/Delete Reply

    일다의 성장 지켜보면서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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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왜 우리의 대통령이었을까

즐거운 일기 2009. 5. 25. 07:30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려 하지만
아직 믿기지 않는다. '그래, 꿈이었지?' 묻고 싶어진다.
충격도, 슬픔도 더욱 커진다.


그때, 노란 물결 속에 치뤄진 선거는 재미있었다.
그는 모두가 고개를 젓는 더러운 정치판에서
보기 드물게, 뽑아줄 만한 후보였
다.

우린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했고,
 오만한
국회로부터도 보호했다.
파병반대집회에서 그를 원망하며 물러나라 외쳤던 때조차,
그를 진심으로 미워한 이는 드물었다.

그래, 그를 미워한 것은 우리가 아니었지.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기에, 낡은 정치에 길들여진 자들로부터
'예우'는커녕 천한 취급을 받았던 대통령.

정치보복을 방어하기엔 너무 인맥이 없었던 정치인.
인맥이 없는 탓에, 오히려 편안하게
청와대에선 맛보지 못했을 행복을 농촌에서 누리며 살길 바랬건만-

아쉽고 안타깝고 불행하다.
이것이 비극의 서막인 것 같아 두렵다.

그는 왜 이 나라의 대통령이었을까,
나라 수준에 걸맞는 대통령은 바로 지금 우리 위에 군림하고 계시는데...
이명박 등속이야말로 이 사회의 수준을 대표하고 있지 않은가?
대통령답지 않고, 정치인답지 않고, 어르신답지 않았던 그는
바위 위에서 몸을 던져야 하는 운명이었다.

언제나 누군가는 죽고, 산 자는 살아간다.
그러나 당신의 죽음에, 산 자들은 '남겨졌다'.
당신의 영정 앞에서 이 땅의 희망을 소원하기엔
너무나 미안해서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다.

힘겨운 생이었지만, 당신은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시민 앞에서 재롱을 떨던 그 모습, 잊지 못할 것이다.

NIKON CORPORATION | NIKON D300 | Aperture priority | Pattern | 1/320sec | F/7.1 | 0.00 EV | 200.0mm | ISO-200 | Flash did not fire | 2008:08:28 11:09:24

"바보 노무현" © 사진 출처- 사람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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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쟈니 2009.05.25 18:51 Modify/Delete Reply

    우린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했고, 오만한 국회로부터도 보호했다.
    파병반대집회에서 그를 원망하며 물러나라 외쳤던 때조차,
    그를 진심으로 미워한 이는 드물었다.

    ======= > 이 말이 내 심정이다 그의 몇몇 정책을 비판했지만,
    그에겐, 대통령이라는 지위로 한계지어진 상황이 분명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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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정의에 대한 하나의 의문"

즐거운 일기 2009. 2. 16. 21:09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민주주의가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인가?


-에리히 프리트(Erich Fried)


<1968 :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에서 재인용
(타리크 알리, 수잔 왓킨스 공저|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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