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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11 기록9.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끝
  2. 2011.03.04 기록8.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3
  3. 2011.02.19 기록6.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1
  4. 2011.02.15 기록5.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서 온 편지

기록9.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끝

일다와 함께 2011. 3. 11. 16:05
여성주의 저널리스트로 살아가는 동력
<조이여울의 記錄>(9)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4 

세상이라는 큰 벽에 부딪힐 때

 
여러분은 편지에서, 여성주의자로 언론활동을 하는 것의 ‘무력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무력감 뒤에는, 지금까지 활동해온 내용과 시간에 대한 당혹감이 뒤따른다는 것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요.
 
최근에 나는,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인적으로 통장 잔고도 없고, 10년 전에 비해 기력도 한참 딸리는 데다가, 발돋움할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요. 반면 세상은 쳇바퀴 돌고 있고, 실제 인류의 역사가 그러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더욱 부각되어 다가왔습니다. 21세기에도 전쟁이 계속되고, 돈이 정치를 하게 되고, 사회적 불평등은 더 커져가는 상황이 좀처럼 나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바보들의 대행진을 했나? 하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그것이 바로 무력감이겠지요.
 
여러분도 이미 느끼고 있듯이, 세상은 정말 그 흐름을 바꾸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요. 우리는 현실을 인식해야만 하니, 자신의 노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식의 사회운동권 특유의 착각상태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상황 속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되더군요. 어쩌면 내가 너무 큰 욕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닐까? 하고요.
 
몇 달 전 서울에 있는 한 대학건물 안에서 잘 알고 지내던 취재원을 만났습니다. 미리 약속장소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대학이란 공간이 퍽 낯설더군요. 마치 어떤 큰 회사건물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학생들의 모습도 꼭 회사 인턴사원들 같아 보이고 말이지요. ‘정말 각박하구나, 세상 심란해졌다’ 싶었죠. 그리고 이런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일다>를 꾸려가고 있는 나는, 사회에서 보면 “우물 안 개구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물론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니지요. 우물 밖 사회를 조망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일다>가 작은 우물일 뿐이라는 생각은 틀리지 않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다음 이야기입니다. 회사 같은 분위기의 대학건물에서 만난 취재원과의 대화는, 그렇기 때문에 더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일다>는 사회라는 넓은 공간에서 작은 하나의 우물일 뿐이고, 그런데 바로 그 우물이 무척 소중하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내가 저널리스트로 살아오면서 보람을 느낄 때가 언제냐고 물었지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보람을 느낄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일다> 독자위원회가 결성된 것도 그 한 가지 예입니다. 대체 어디서 이런 사람들이 튀어나왔을까 싶더군요. 대부분 20대~30대 사회 생활을 하는 여성들인데, 정말 다양한 위치에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독자위원들은 <일다>가 소중하다고 평해주고, 매달 정성스럽게 모니터링을 해줬습니다. 이것이 <일다>의 힘이구나 싶었지요. 독자들과의 만남은 기자에겐 정말 큰 힘이 됩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세상에 가려진 채 방어적으로 매체를 대해야 했던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이 <일다>의 기자들과 만날 땐 안심하고 편안하게 대한다는 점도 기쁜 일입니다. 그런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공감하고 배우고 참여하는 기자에게 주어진 특권이라 할 수 있지요.
 
사실 예전에 나는 에너지를 쏟아 부어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쓸 때, 사회에 뭔가 공헌을 하는 듯한 기분이었던 것 같아요. 글을 쓰는 것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일이라 생각했고, 실제 그렇기도 하지요. 그러나 나는 이제야 비로소, 독자들의 존재가 있기에 나의 글도 있고 내 역할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언제나 독자들이 내게 발언권을 주었고,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도 주었구나 하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지면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함께 고민하고, 배우고, 지켜봐 주고, 성장하는 일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연대에 대하여

석순의 편지에서 ‘연대’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답하는 것으로, 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해요. 함께 하자는 말은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얘기, 하지만 여성주의자의 ‘다름’을 인정하는 작업에서는 스스로 인색했던 것 같다는 얘기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소외되어있거나 취약하다고 생각될 때 더욱 그러하지요. 손 잡을 이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인색해집니다.

 
나는 좀 우스개 소리로 ‘뜻을 모으기는 쉬워도 성격을 맞추기는 어렵더라’는 말을 할 때가 있어요. 이 말은 또, 지금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환경이 다르다’는 얘기로 치환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인생이 있고, 때문에 가야 할 길도 다를 거예요. 사람이 변한다고 느껴질 때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삶은 변화하게 마련이고, 그 변화를 두려워하고 미리 제약할 필요는 없지요. 언젠가 또 옆에서 볼 것입니다. 다른 위치에서 말이지요.
 
나는 석순과 같은 매체를 볼 때에도, 그 매체의 내용뿐 아니라 매체를 만들어가는 구성원들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전과는 달라진 점인데요.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씨앗’으로 보이는 것이지요. 어디에서 싹을 틔우든 그것이 언론인으로서든 여성운동가로서든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상관 없습니다. 사람이 소중합니다. 그것은 나의 선배들이 나에게 보내준 시선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네가 어디에서 있건, 꼭 <일다>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디에서건 그 빛을 발하고 있을 테니까’ 라고 말해주었지요. 예전엔 미처 그 말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것은 어딜 가나 훌륭한 활동을 해야 한다거나, 내가 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부각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에요.
 
우리의 인생은 계속됩니다. 인권도, 평등도, 삶의 연속선 상에서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개개인의 삶이 중요합니다. 누구와 일하며, 어떤 이들과 교류하고 살 것인가의 문제에서 ‘연대’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통장 잔고보다 친구들이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수긍하는 사실이고, 뜻을 함께할 수 있는 동료 한 명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지요. 그러나 영원히 같이 하자고 맹세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디에 있든 우리는 연결되어 있고, 다시 만날 수도, 다시 함께 할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친구들도 계속 만나게 되고 말이지요.
 
나는 여성주의가 여성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내가 찾고자 한 여성주의는 언제나 ‘자유’와 관련한 것이었으니까요. 어떤 삶의 모범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아, 그런데 저렇게 살아도 괜찮아’ 이런 식으로 여성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넓혀주고, 그럼으로써 확장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조각보 이미지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평화롭게 연결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보면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모습이 됩니다.
 
지난 시절 함께 여성운동을 했던 동료들, 10년도 더 지난 지금 상황에서 여전히 함께 일하는 이도 있고, 취재원으로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일도 있지만, <일다>의 독자로만 있어주어도 고맙고 즐겁습니다. 지켜봐 주니 고맙다, 옆에 있어주니 힘이 된다, 다시 만날 수 있어 반갑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도 <일다>의 저널리즘을 알리고 교육하는 일을 해나가려 해요. 그리고 나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대학매체를 꾸려나가는 여러분들과 지금 이렇게 편지를 나누는 인연이 소중하다는 것과, 우리 사이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연대의 끈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이만 긴 편지를 마무리할게요. 우린 또 만나게 될 거예요. (끝)

<일다> 2011년 3월 10일에 실림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650

* 이전 글 보기>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서 온 편지 

* 석순에 보낸 편지(1) 여성주의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
* 석순에 보낸 편지(2) 여성과 소외된 이들에게 발언권을
* 석순에 보낸 편지(3) 언론의 영향력에는 양면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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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8.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3

일다와 함께 2011. 3. 4. 14:08

언론의 영향력이란 과연 무엇인가?

<조이여울의 記錄>(8)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3 
 
[올해 초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 편집위원회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여성주의자로서 언론활동을 한다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청탁서였는데, 그 안에는 현재 대학에서 여성주의 매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진솔하고도 소중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나는 흔쾌히 지난 10년 간 저널리스트로 살아오며 ‘여성주의 저널리즘’에 대한 생각하고 실천한 내용과,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들을 정성껏 담아 회신했다. <석순> 측의 동의를 구해, 우리가 서로 나눈 편지의 내용을 재탈고의 과정을 거쳐 <일다> 독자들과 공유한다. 먼저 석순이 보내온 편지를 개재하고, 이어 나의 답신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소외된 이를 대변하는 비주류언론의 딜레마
  
석순은 여성주의 매체의 영향력에 대해 주요하게 고민하고 있지요? 영향력이란, 내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했던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언론은 보다 많은 영향력을 갖길 원하지요. 언론활동이란 것 자체가 널리 알려내는 것이니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일다> 창간 때부터 줄곧 고민해왔지요.
 

“서비스직 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캠페인은 일다에서 첫 보도가 나간 후, 다른 언론들을 통해서도 많이 알려졌고 전국적인 관심과 참여를 모았다.

독자 수가 적은 매체는 보도내용에 대한 사회적인 영향력이 크지 않고, 독자 수가 많은 매체는 실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듯 보입니다. 어떤 보도는 현장에 즉각 반영이 되기도 하고, 정치인들을 바삐 움직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일다>의 경우도 몇몇 보도기사는 실제 정책에 반영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영향력은 더 클 것이라 생각하지만요.

 
사실 <일다>의 기사들은 보도된 이후에, 큰 언론들이 해당 아이템을 다시 다루면서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서비스직 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캠페인은 <일다>에서 첫 보도가 나간 후, 다른 언론들을 통해서도 많이 알려졌고 전국적인 관심과 참여를 모았지요. 그런 일들은 창간 이래 줄곧 있어왔어요.
 
헌데 비주류언론의 기사는 비교적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공유된 내용이기에, 큰 매체들은 그 내용을 가져다 쓰면서 마치 자신들이 발굴한 기사인양 행세하기 쉽습니다. 마땅히 정보의 출처를 밝혀야 할 때조차도, 한국언론들은 ‘관행’이란 미명하에 정직하게 보도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우리를 씁쓸하게 하지요. 재정도, 인력도 열악한 곳에서 애써 발굴한 기사가, 규모가 큰 조직에서 일하는 정규직 언론인들에게 손쉬운 기획거리를 제공해주는 셈이 되니까 말이에요.
 
그렇지만 이 같은 주류언론과의 관계망도, <일다>의 관점과 보도내용이 더 넓게 퍼져나가는 과정으로서 긍정적인 쪽으로 바라보려 노력하고 있어요. 다수의 사람들은 모른다 해도, <일다>가 발굴하여 사회적인 관심을 받고 변화를 가져오게 된 이슈들을 알아봐주는 독자들도 항상 있답니다. <일다> 애독자의 상당수가 기자들, 작가들, 편집인들, 출판기획자들이라는 점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매체의 영향력에는 양면성이 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매체의 ‘영향력’과 관련한 나의 생각을 본격적으로 풀어보려 해요. 사실상 여성과 소수자의 시선을 담는 <일다>의 기사들이 이 사회에서 큰 관심을 받을 거라고는 기대하기 어렵지요. 정성을 기울여 소중한 기사를 작성했건만, 이 울림이 어디까지 닿는 것인지 확인할 수 없고,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공유되고 마는 것인지 답답할 때가 왜 없겠어요? 심지어 어떤 기사는 부디 널리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방송국에 연락해 기사거리로 가져가라고 제보를 하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저널리스트로 10여 년간 일해온 지금, 나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고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매체의 영향력일까?
 
이를 테면 TV 방송은 영향력이 크지요. 그러나 과연 누구에게 무슨 영향력을 주고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방송의 어떤 프로그램 혹은 어떤 보도가 훌륭하다고 해서, 해당 방송이 광고나 다른 프로그램으로부터 자유롭게 동떨어져 존재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지요. 방송은 광고와 시청률에 의존하고, 그렇기 때문에 내외부적으로 검열이 따릅니다. 더구나 매체가 조장하는 소비와 외모지상주의, 그리고 많은 왜곡된 이미지들을 보십시오. 우리는 미디어를 볼 때, 그 양면성을 함께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큰 매체를 통해서는 보도 내용을 사회적으로 이슈화하는 것이 비교적 쉽지요. 그러나 다루고 싶은 이슈를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경우 역시 많습니다. 사실은 한계가 분명합니다. 광고수주와 구독률(또는 시청률)이라는 무시 못할 물리적인 기준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비교적 안정적이고 학력도 높은 편인 언론인들의 지위와 신분이, 자신과 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문제를 섬세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고 말이지요.
 
TV 뉴스에선 왜 노동 이슈를 그다지 주요하게 다루지 않을까요? 이와 관련해선 방송국 기자와 직접 얘길 나눈 적이 있습니다. 나는 왜 뉴스에서 노동 사안을 ‘노사가 싸운다’ 정도로밖에 다루지 않는지, 지금처럼 동일노동동일임금이 중요한 시기에 왜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지 물었지요. 기자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라는 점도 있지만, 뉴스의 특성상 긴 설명이 필요한 내용을 다룰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임금 문제와 같은 민감한 사안을 다루기엔 내부에서 합의가 되지 않았다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이런 언론환경에서 일하는 여성주의자 언론인이 있다고 가정해보세요. 영향력 있는 매체에서 일하지만 정작 기획회의 때 꺼내지도 못하는 사안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관심도 없는 분야에서, 동의하지도 않는 내용을 보도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생깁니다. 게다가 여성주의가 끼어들기엔, 언론계라는 노동현장은 아직도 상당히 남성중심적이지요. 자신이 일하는 곳에서 그다지 존중을 받지 못하는 상황 또한 개개인의 여성언론인에게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규모가 큰 매체에서 기자나 피디로 일하는 것이 덜 중요하고 의미가 적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여성주의자가 어디에서 일하든, 그 역할은 분명히 있을 것이고, 나는 언제나 지지하지요. 다만 언론의 영향력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점과, 여성주의 언론인으로서 ‘영향력’에 대한 자신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타 매체에서 하찮은 취급 받으며 묻히는 기사가 여성주의 저널에선 빛이 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장애여성의 목소리는 대부분의 언론에서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다뤄진다 해도 한두 번 부각되고 말아버리지요. 그나마 선정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면 다행이고 말입니다. 반면, 장애여성 이슈가 <일다>에서는 메인 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매체에 실리는 것이 더 영향력을 갖는 것일까요? 답을 내리기 쉽지 않은 문제이지요.
 
지속적인 것보다 강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국의 뉴스가 돌아가는 풍토를 좀 보세요. 아무리 큰 이슈도 하루 이틀밖에 생명력을 갖지 못합니다. “하루 반짝”, 이게 한국의 뉴스를 표현해주는 단어가 아닐까요? 차별과 평등의 문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이야기, 생태적인 관점, 소수자의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 이런 기사를 꾸준히 언제나 볼 수 있는 매체로서 <일다>는 자리매김을 해나가고 있고 그것이 영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주의 언론의 영향력은 독자들과의 만남이나 필자들과의 만남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사회에서는 “충성도” 라는 표현을 주로 씁니다. 나는 “애정도” 라고 말하곤 하죠. 알짜배기 독자들이 얼마나 있는가, 즉 독자들이 매체를 얼마나 아껴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일다>는 독자들의 “애정도”에 있어선 손에 꼽히는 매체일 거라고 자부한답니다.

 
원고료도 거의 없는 <일다>에 흔쾌히 글을 기고해주는 필자들이 있고, 다른 매체 기자들과는 인터뷰하지 않지만 <일다>의 요청에는 기꺼이 응해주는 취재원들이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이는 곧, 독자들이 <일다>를 통해서만 만나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것도 영향력 아닐까요?
 
여성주의 저널의 운영, <일다>의 재정
 

▲ 기사 모니터링과 후원캠페인 참여 등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고 있는 일다 독자위원회.

영향력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여성주의 매체는 ‘재정’의 문제에서 너무나도 큰 벽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석순이 당면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여성주의 언론의 존립 자체와 관련이 있는 이 문제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를 드리려 해요.

 
2003년 <일다>가 세상에 나온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비롯해서 구성원들이 너무도 순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름을 구할 수 없는 곳에서 자동차를 만든 셈이라고 할까요? 나는 그보다는 ‘모래 위에 성을 쌓았다’는 비유를 더 즐겨 하지만 말입니다.
 
광고 없이 독자들의 구독료로 운영이 되는 언론은 별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신문인 <일다>는 구독료마저 없는 것입니다. 언론이 구독료도 아닌 ‘후원’으로, 광고 없이 유지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저널의 운영을 책임져야 했던 나에겐 수년 간 너무나 버거운 짐을 얹고 있는 듯했습니다. 더구나 창간 초기엔 편집장이면서 동시에 운영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일다>의 운명은 바람 부는 등잔 위의 불꽃이나 다름 없었지요.
 
대부분 인터넷 신문들, 소위 ‘남성들 조직’에 비하면 <일다>의 시스템은 소꿉장난에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한 언론학과 교수는 인터넷신문 관련한 실사를 나왔다가, <일다>의 재정상황을 확인하고는 거의 기절을 하셨지요. 바깥에서 보는 <일다>는 안정적인 체계를 갖춘 규모 있는 언론으로 보였는데, 매체가 운영될 수 있는 바탕인 재정 수준이 동호회 내지는 대학동아리 수준이었기 때문이에요.
 
재정이 약하고 운영이 부실한 관계로, 안정적인 시스템을 갖출 수 없었기에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습니다.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불필요한 일에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고 심적으로도 큰 부담을 안게 되지요.
 
그러던 것이 동료인 윤정은 기자가 편집장을 맡게 되고(운영자와 저널 책임자가 분리되고), 많은 분들이 지혜를 모아준 덕분에 <일다>는 2009년에 유한회사(주식회사의 작은 형태로 보시면 됩니다) 미디어일다를 설립하고, 보다 튼튼한 시스템을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무 명의 사원(주주 개념)이 함께 조직을 세운 것인데, 상법 상으론 투자의 개념이지만 실제로는 <일다>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좀더 큰 후원을 해준 것이나 다름 없어요.
 
사실상 <일다>를 만들고 유지해온 것은 돈이라기보다 애정과 정성입니다. 미약하게 세상에 태어난 작은 불꽃이 꺼질까 봐, 금이야 옥이야 지켜주고 지지해준 사람들의 그 마음이, 그 정성이 <일다>를 지금까지 있게 한 힘이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300여명의 ‘일다의 친구’들. 후원금액으로 따지자면 매체를 굴러가게 하기엔 턱도 없는 액수지만, 나는 친구들 명단을 볼 때마다 <일다>에 매달 기부를 해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감탄하곤 합니다. 수십만 독자 수를 내세우는 매체들과 비교해 너무 약한 외침이라고, 혹은 수천 명이 큰 액수를 기부하는 조직들에 비해 인정을 못 받는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기준이니까요.
 
지금 <일다>는 박희정 기자가 3대 편집장을 맡아 저널을 책임지고 있고, 편집위원들과 통신원, 필자들이 함께 기사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윤정은 기자는 출판기획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필자 최현정씨의 책 <조용한 마음의 혁명>을 발간했지요. 영업을 담당하고 있는 함수연씨도 함께, 아주 작은 규모지만 (유)미디어일다는 앞으로 다양한 실험을 해보려고 기지개를 펴고 있는 시기랍니다.
 
물론 아직도 <일다>는 고용을 보장한다고 하기엔 너무나 적은 액수의 임금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언론 일이 가져다 주는 스트레스는 여전하므로, 일하는 사람들의 환경을 개선하는 일은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그래도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 구성원들이 매년 논의하고, 또 논의하고 있어요. 머리를 맞대면 뭔가 뾰족한 수가 하나씩 나온답니다. 제가 휴가를 얻어 과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그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일다> 2011년 3월 4일에 실림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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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6.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1

일다와 함께 2011. 2. 19. 08:30
여성주의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
<조이여울의 記錄>(6)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1 
 
[올해 초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 편집위원회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여성주의자로서 언론활동을 한다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청탁서였는데, 그 안에는 현재 대학에서 여성주의 매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진솔하고도 소중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나는 흔쾌히 지난 10년 간 저널리스트로 살아오며 ‘여성주의 저널리즘’에 대한 생각하고 실천한 내용과,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들을 정성껏 담아 회신했다. <석순> 측의 동의를 구해, 우리가 서로 나눈 편지의 내용을 재탈고의 과정을 거쳐 <일다> 독자들과 공유한다. 먼저 석순이 보내온 편지를 개재하고, 이어 나의 답신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석순을 비롯한 대학 여성주의 매체의 역할
 
안녕하세요? 잇지님, <일다>에서 일하고 있는 조이여울입니다.
 
석순 편집위원회로부터 편지를 받고 반가웠습니다. 저는 지금 멀리 인도에서 잠시 머물고 있어요. 저널리스트로서 일해온 지 10년, 제 삶에 뭔가 매듭 짓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동료들의 배려 속에 몇 달 간의 휴식을 갖기로 한 것이죠.
 
이곳에서 그간의 활동을 정리해보고 <일다>의 저널리즘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면서 앞으로의 일을 계획해보는 와중에, 석순으로부터 “여성주의자로서 언론을 한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입니다. 절묘한 타이밍이라고 생각이 되더군요. 그래서 휴가 중엔 <일다>에 칼럼을 연재하는 것 외엔 일을 손에 잡지 않겠다는 결심을 깨고, 말 그대로 석순에게 (그리고 석순을 통해 만나게 될 독자들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대해서는,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대학에서 여성운동을 하던 1990년대 중반에도 석순과의 교류가 있었고, 이후 기자 생활을 하면서 석순 편집위원들이 졸업 후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 비교적 최근에도 <일다>를 꾸려가면서 여러분의 선배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지요. <석순>과 중앙대학교 <녹지>, 그리고 성공회대 <앤> 모두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는 대학 매체들입니다.
 
석순에 대한 나의 생각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여성주의가 뿌리 내리기 척박한 땅에서 이만큼 자리를 잡다니 장하다’는 것이죠. 물론 석순과 녹지의 경우는, 이미 재정에 있어서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활동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배경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매체의 성격은 어떤 사람들이 만드느냐에 따라 180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척박한 땅’에 대한 얘기가 나온 김에, 이화여대 여성위원회 활동을 했던 때가 떠오르네요. 1997년이었을 거예요. 당시 연대활동을 통해 고려대학교 여학생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친구를 알게 되었는데, 고려대학에서의 여성주의 활동은 너무나도 적대적인 환경 속에 이루어졌기에 종종 위로를 전하러 가곤 했답니다.
 
여성문화제 기간에 학내 공간 중에서 성차별적인 곳에 깃발로 표시를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남학생들이 여학생휴게실로 대거 몰려갔던 에피소드는 귀여운 짓에 불과했죠. 애써 만들어 붙인 플랜카드가 하루도 안돼 찢기는 상황은 좀 포악했지만요. 지금이야 학내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겠지만, ‘무관심’이라는 벽은 어쩌면 더 높아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지 내용을 보니, 아마도 대학 내 여성주의 매체를 만드는 사람들의 고민 중 상당 부분이 이 문제와 관련이 있을 듯 하군요. 이에 대해선 차차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
 
먼저, 언론의 특성과 관련하여 내 의견을 전하고 싶어요. 학생 신분의 기자들은 자신이 사회 언론인에 비해 비교적 한정된, 작은 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매체가 다루는 주제와 독자의 범위를 본다면 물론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학생이라는 지위의 특성상 노동문제와 같이 생존권에 있어 중요한 이슈를 다룰 때, 현실을 잘 조망하지 못한 채 이론적으로 (또는 이념적으로) 접근하는 등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지요.
 
우리는 주로 매체 시스템의 규모나 보도분량, 독자 수 등을 따져서 크고 작고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역할에 있어서 만큼은 대학매체가 작다고 보지 않아요. 각 매체의 특성이 있다고 여길 뿐이지요. 세계각국의 소식을 전하는 뉴스프로그램과 어느 지역의 동네신문을 비교했을 때에도, 그 특성이 다를 뿐이지 역할에 있어 어느 쪽이 크다 작다 판단하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언론에서만 다룰 수 있는 내용이 있고, 같은 사안도 학생들의 시선으로 담겼을 때 역시 같은 학생인 독자들 눈높이에 좀더 맞춰서 다가갈 수 있지요. 특히 요즘처럼 “20대”라는 세대 자체가 키워드로 부각된 시기에, 학생들이 직접 발언하고 담론을 생성하는 과정은 대학의 담장을 넘어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도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성주의 언론’ 또는 여성주의와 언론
 
그럼 이제부터 여성주의 언론에 대해, 또는 ‘여성주의’와 ‘언론’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할게요. 언론은 사실성과 객관성, 그리고 공정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지요. 여성주의 언론은 이중 특히 ‘객관성’과 관련한 부분에서 논란이 됩니다. 어떤 사안을 보도하는 기자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거기에 여성주의라는 이물질이 들어가면 편파적인 보도를 하게 되지 않냐는 지적을 받는 것이지요.
 
나는 기자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기자도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자세를 갖고 있지는 않다는 걸 먼저 인정한다는 점이지요. 또한 언론은 특정 사안을 독자들에게 보다 ‘객관화’하여 전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언론도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언론이 이미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때, 오류가 시작됩니다.
 
모든 매체는 색깔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색깔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독자들이 어떤 매체를 좋아하거나 그 보도활동에 신뢰를 갖는다고 했을 때, 그것은 그 매체의 논조와 기사의 방향에 동의하거나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사실 아무 색깔도, 방향도 없는 매체는 언론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때의 객관성이란, 매체의 색깔에 맞춰 부풀리기나 끼워 맞추기 식의 왜곡이 일어나지 않게(한국의 많은 언론들이 지키지 않고 있는 윤리이지요) 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언론의 ‘객관성’과 ‘여성주의’의 관계는, 또 하나의 큰 원칙인 ‘공정성’의 배경 하에 설명이 되어야 합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언론들이 전혀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성주의 언론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는 것입니다. 여성주의 저널리즘은 언론들이 실제로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으면서도 마치 순도 100%의 객관성이 있다는 듯 포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미 공정성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쯤에서 <일다>라는 매체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일다’라는 말은 옛 우리말로 ‘이루어지다, 되다’라는 소망의 의미를 담고 있지요. 이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뜻도 가지고 있는데 ‘물결이 일다, 파도가 일다’ 할 때의 생성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쌀을 일다’ 라고 할 때, 체로 쳐서 쭉정이와 알갱이를 거른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정보를 건져서 전달하는 언론의 기능을 감안했을 때, 어울리는 이름이라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이제 ‘거른다’는 의미로, 여성주의와 언론의 관계를 설명해보도록 할게요. 주류 언론들은 이 변화무쌍하고 사건 많은 사회에서 비슷한 내용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우화적으로 비유하자면, 세상이라는 그림을 다수 언론들이 녹색 계열의 색깔을 대부분 빼버리고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론들로부터 버려진 녹색 계열의 색깔을 주로 담는 매체를 만들기로 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림에 녹색 계열의 색깔이 포함되었을 때 어떻게 달라 보이는지, 원래 어떤 그림이었는지 알려나가기로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성주의 저널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나는 독자들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야기가 이곳에는 있군요” 라고 할 때, 혹은 “아, 그 사건을 이런 시각으로 보면 전혀 다른 내용이군요” 라는 반응을 보일 때, 그것이 곧 “이 언론이 한국의 언론시장에 공정성을 부여해주고 있군요” 라는 의미라고 받아들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이슈를 ‘보다 객관화시켜 주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고 말이지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일다>가 세상에 나온 2003년에는 ‘여성주의’라는 용어가 지금과 비교했을 때 정말 알려지지 않은, 게다가 형편없이 대우받고 누가 걸치냐에 따라 왜곡되기 십상인 개념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다>를 만든 이들은, ‘여성주의’라는 이름을 걸었을 때 독자들이 다가가기 어렵고 원치 않는 색깔로 이미지가 덮일 수 있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가 무엇인지 (무엇이 아닌지)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여성주의 저널을 표방한 것입니다.
 
2011년, 이제 8살이 된 <일다>에서 일하는 구성원들은 이전에 비해 ‘여성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애써 부각시키려 노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일다>의 역할을 진단해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설계해가는 과정에서 나름 도출되고 있는 견해인데요. <일다>가 ‘여성주의 저널’로서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어떤 사안들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왔는지 지난 8년간 이미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일다>에게 더욱 중요한 과제는 ‘여성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나가는 일이라기보다, 다양한 여성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문을 더 크고 넓게 여는 것, 사회 곳곳에서 대안을 만들어가는 사람들과 연대의 끈을 더 튼튼히 엮는 것이랍니다. 

<일다> 2011년 2월 18일에 실림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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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5.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서 온 편지

일다와 함께 2011. 2. 15. 14:48

대학 여성주의 매체들의 역할과 고민

<조이여울의 記錄>(5)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서 온 편지 
 
올해 초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 편집위원회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여성주의자로서 언론활동을 한다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청탁서였는데, 그 안에는 현재 대학에서 여성주의 매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진솔하고도 소중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나는 흔쾌히 지난 10년 간 저널리스트로 살아오며 ‘여성주의 저널리즘’에 대한 생각하고 실천한 내용과,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들을 정성껏 담아 회신했다. <석순> 측의 동의를 구해, 우리가 서로 나눈 편지의 내용을 재탈고의 과정을 거쳐 <일다> 독자들과 공유한다. 먼저 석순이 보내온 편지를 개재하고, 이어 나의 답신이 4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위로 혹은 질타 그도 아니면 조언을 기다리는 편지>
 
안녕하세요, 조이여울 님 
저는 석순에서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잇지라고 합니다.
 
이 글은 '여성주의자로서 언론을 한다는 것'에 관한 원고를 부탁하는 청탁서입니다. 하지만 이 글의 본심은 대학이라는 보다 작은 공간에서 여성주의 언론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보다 넓은 한국 사회라는 공간에서 여성주의 언론활동을 하고 있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것입니다. 답답하고 막막했던 고민들을 쏟아내면서 위로 혹은 질타 그도 아니면 조언의 답장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 1983년 창간된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의 창간호 표지

우선 석순을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석순은 80년대 말 대학가를 중심으로 여성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에 세워진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입니다. '여성'의 얘기만이 여성주의가 아니듯 석순에서는 여성으로 은유되어 왔던 소외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쓰기에 쑥스럽지만, 고려대학교 내 <일다>같은 언론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일다가 웹이라는 방식을 통해 글을 배포한다면, 저희는 종이지면을 통해 독자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한 학기에 한 번 정도 발간되며(이제 두 번으로 늘릴 예정입니다), 학생들이 내는 교지대를 통해 인쇄비를 충당하고 있습니다. 35집까지 발간됐으며 현재 36집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이번 36집 <여성주의 저널> 기획에서는 여성주의자가 언론활동을 하면서 겪는 고민과 난관에 대해 풀어내려 합니다. 원래 이 기획은 학내 여성주의 저널인 '석순'의 연대기와 시대적 상황을 엮어 '석순의 역사'를 써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예전의 석순을 훑어보는 글이 석순활동을 하는 현 편집/수습위원들에겐 유익하고 흥미로울 수 있겠으나, 독자들에게는 '뻔한' 옛날 운동권 얘기로만 들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것보다는 좀 더 현재적 얘기를 해보자는 취지에서 지금 여성주의 저널들이 갖고 있는 고민을 풀어내보려 합니다.
 
<석순> <녹지> <앤>… 대학 여성주의 매체들의 고민
 

우선, 다른 학교 내 언론(지면을 갖고 글을 써서 여성주의관련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풀 예정인 집단)들과의 좌담회를 준비했었습니다. 여러 군데 초대장을 보냈지만 각자의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결국 좌담회에 응해준 중앙대 여성주의교지 <녹지>, 성공회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앤>친구들과 속 깊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결국 다들 '힘들다'였지만, 그래도 '힘내보자'라는 결론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런데 좌담만으로 저희의 먹먹한 고민들을 해결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학외에서 여성주의 언론 활동을 하고 계신 분의 경험이 담긴 글을 받아보기 위해 이렇게 메일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일다>는 제가 자주 들리는 사이트 중 하나입니다. <일다>의 기사들은 다른 뉴스에서 시끄러웠던 일들을 (일부러) 안 다루기도 하고, 똑같은 소식을 다루더라도 다른 언론에서 들려주지 않았던 관점에서 서술돼있었습니다.
 
흔히 언론은 '중립적' 관점으로 '객관적' 사실만을 전달하는 수단적인 곳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언론은 어떤 정치색도 띠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 받으며, 만에 하나 정치색을 뚜렷하게 밝히는 언론이 있다면 그 언론은 국민을 호도하며 권력을 남용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식의 언론관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주의 언론'이란 말은 모순된 표현처럼 들립니다. "여성만 대변하는 언론이 무슨 언론이야"라는 '비난'은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언론을 편향된 '정치활동'으로 치환시켜버립니다. 즉 믿을 만한 ‘사실’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는 거죠.
 
고려대 학생들도 석순을 언론이라기보다 ‘활동’하는 곳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겁니다. 활동이라는 표현은 응당 석순에게 어울릴 테지만, 독자들에게 뚜렷한 여성주의라는 색깔은 거부감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때문인지 사실 석순의 독자가 많은 편은 아닙니다. 생산된 글이 읽히지 않는 것만큼 비극적인 일도 없을 겁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공론화시키고 싶어도 읽어주는 사람과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적어 그 영향력과 파급력이 미미합니다.
 
독자가 적다는 일은 또 다른 의미에서 비극(?)적입니다. 석순은 교지대를 받고 있어 다행이지만, 일반적으로 독자의 수는 곧 매체를 생산할 자본금과도 직결된 문제니까요. 실제 많은 여성주의 언론이 후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기업이 여성주의 언론을 달가워해 광고를 선뜻 줄 리 없고, 국가 차원의 재정지원을 받더라도 편집권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후원이나 구독료는 언론이 튼튼한 재정구조를 가질 수 있는 가장 믿을 만한 방법이지만, 이건 독자가 많을 때 가능한 얘길 겁니다. 독자가 적은 여성주의 저널은 늘 가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거겠죠.
 
여성주의 언론은 이 세상에서 소외돼왔던 이들의 말을 전하려다보니 ‘언어의 부재’라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말이라는 게 워낙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관념들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심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자칫 오해와 편견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독자와의 지속적인 합의 없이 갑자기 새로운 말을 사용한다면 그 말은 언어로써 제 기능을 못하게 돼버리고요. 그런 측면에서 '비혼'이나 '완경기'라는 단어가 나름 상용화된 것은 정말 기뻐할 만한 일입니다.
 
여성주의 언론으로서 지적받는 또 다른 문제는 맥락이나 상황설명을 조목조목 하다 보니 글이 길다는 겁니다. 우리의 뜻을 제대로 전달해줄 언어가 부재하기 때문에, 일상화된 언어를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생략'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 때문이죠. 조근조근 풀어가며 달래듯 '이래서 이러한 거야'라는 식의 설명은 독자들에게 '계몽적이다'라는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우리가 독자를 계몽하려는 것인가? 우리의 말을 전하는 일이 '모르는 독자'를 '아는 우리'가 가르쳐야 한다는 도그마에 빠져있던 것인가? 독자 스스로 '계몽되어야겠다!'라는 의식을 갖는 일은 반길만한 일이지만, '왜 날 계몽시키려들어?'라는 반감은 글쓴이를 이미 권위자로 인정하고 거기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일 테지요. 그렇다면 여성주의자들은 '계몽' 냄새가 최대한 나지 않게 써야하는 것일까? 자문과 자성이 꼬리를 뭅니다. 여성주의가 권위를 갖는 순간 그 권위마저 경계하느라, 여성주의자들은 할 말을 못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성주의자가 언론활동을 한다는 것
 
그래도, 그래도 저에게 여성주의 저널은 저널로서 하고 있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그것은 '위로'였습니다. 내 탓이라 생각하며 꾹꾹 눌러두었던 경험들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나에게 공감해주는 글들. 거기서 자연스레 위로를 받았습니다. 글을 쓰는 입장이 되었을 때도 줄곧 얻었던 것은 자유롭다는 해방감과 나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여성주의 저널에는 경험담이 많습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 했다"같이 대상화된 정보가 아니라, 나에게서 출발한 말들은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누군가를 향해 손길을 내미는 그런 기사 말입니다. 여성주의 저널은 정보전달자와 정보수용자라는 이분된 관계마저 흩뜨려 놓습니다.
 
그 다음은 '저항'입니다. 지금껏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전하는 일은 불온합니다. 가려졌던 경험들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고 퍼뜨리는 여성주의 언론은 근본적으로 현 체제와 완벽하게 타협할 수 없습니다. 여성주의자들 기질 자체가 그렇다기보다(그런 기질도 없잖아 있긴 합니다만) 체제에서 밀려난 자들이 모인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곳 사정이 단일한 것만은 아닙니다. 저마다 위치가 다르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다릅니다. 동일한 사람도 어떤 곳에선 소외자이지만 어떤 곳에서는 권력자가 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소외를 생산하는 위계적 구조만큼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가부장제 구조는 물론 자본주의 질서와 인종과 장애 그리고 성적지향에 따른 차별주의에 맞서 위계적 구조를 허무는 게 여성주의 언론의 역할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여성주의 언론은 할 일이 넘쳐 일손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 "내가 아무리 말해도 세상은 너무나 온전합니다." © 일다

하지만 그 역할들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생각해볼 때마다 답답하고 암울하기만 합니다. 내가 아무리 말해도 세상은 너무나 온전합니다. 여전히 독자들은 무관심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말이 늘어 갑니다. 저항이 무력하다는 의구심이 뚜렷해져 갈수록 차라리 침묵하고만 싶어집니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는 우리가 작고 낮은 산에서 외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더 높은 산에 오르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우리의 목적은 크고 높은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변자들이 중심을 해체하기 위해 또 다른 중심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소외자들이 겪는 딜레마입니다. 여성주의가 태생적으로 크고 높은 산일 수 없다는 게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이런 모순이 운명 같아 슬프지만, 그 만큼 할 말이 많다는 증거이기에 "힘내자"라고만 자꾸 되풀이합니다. 그런데 그 힘 무엇으로 내야 할까요? 있던 힘도 빨아가는 세상인데 말입니다.
 
'연대'는 낙담하는 여성주의자를 위해 있는 단어 같습니다. 나 혼자라는 지독한 외로움이 가실만큼 함께 하자는 말은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니까요. 하지만 그마저 약발이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연대는 단순히 같은 사람끼리 모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차이를 살펴 그것을 드러내고 함께 할 수 있는 지점들을 모색하는 일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연대입니다.
 
그런데 이제껏 저는 ‘같은’ 여성주의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나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는 작업에 인색했던 것 같습니다. 여성주의자라면 응당 나와 같다고만 생각한 것이죠. 길을 잃은 것 같기도 하고 동아줄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합니다. 새삼 견고하고 높다란 탑이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내가 이 탑과 싸워 무너뜨리기보다 내가 이 탑이 되는 게 빠른 세상이 원망스럽습니다.
 
조이여울님의 답장을 기다립니다.
 
여성주의 저널활동을 해오면서 겪었던 보람과 회의, 그렇지만 지금까지 계속 활동을 하게 한 힘, 현실적으로 여성주의 저널이 당면한 문제와 나름 그에 대한 비책(!). 여성주의 저널 전반에 대해 가졌던 단상들을 들려주신다면 그것은 석순의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잇지)

<일다> 2011년 2월 15일에 실림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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