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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19 기록6.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1
  2. 2011.02.15 기록5.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서 온 편지

기록6.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1

일다와 함께 2011. 2. 19. 08:30
여성주의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
<조이여울의 記錄>(6)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보낸 편지-1 
 
[올해 초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 편집위원회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여성주의자로서 언론활동을 한다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청탁서였는데, 그 안에는 현재 대학에서 여성주의 매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진솔하고도 소중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나는 흔쾌히 지난 10년 간 저널리스트로 살아오며 ‘여성주의 저널리즘’에 대한 생각하고 실천한 내용과,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들을 정성껏 담아 회신했다. <석순> 측의 동의를 구해, 우리가 서로 나눈 편지의 내용을 재탈고의 과정을 거쳐 <일다> 독자들과 공유한다. 먼저 석순이 보내온 편지를 개재하고, 이어 나의 답신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석순을 비롯한 대학 여성주의 매체의 역할
 
안녕하세요? 잇지님, <일다>에서 일하고 있는 조이여울입니다.
 
석순 편집위원회로부터 편지를 받고 반가웠습니다. 저는 지금 멀리 인도에서 잠시 머물고 있어요. 저널리스트로서 일해온 지 10년, 제 삶에 뭔가 매듭 짓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동료들의 배려 속에 몇 달 간의 휴식을 갖기로 한 것이죠.
 
이곳에서 그간의 활동을 정리해보고 <일다>의 저널리즘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면서 앞으로의 일을 계획해보는 와중에, 석순으로부터 “여성주의자로서 언론을 한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입니다. 절묘한 타이밍이라고 생각이 되더군요. 그래서 휴가 중엔 <일다>에 칼럼을 연재하는 것 외엔 일을 손에 잡지 않겠다는 결심을 깨고, 말 그대로 석순에게 (그리고 석순을 통해 만나게 될 독자들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 대해서는,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대학에서 여성운동을 하던 1990년대 중반에도 석순과의 교류가 있었고, 이후 기자 생활을 하면서 석순 편집위원들이 졸업 후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 비교적 최근에도 <일다>를 꾸려가면서 여러분의 선배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지요. <석순>과 중앙대학교 <녹지>, 그리고 성공회대 <앤> 모두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는 대학 매체들입니다.
 
석순에 대한 나의 생각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여성주의가 뿌리 내리기 척박한 땅에서 이만큼 자리를 잡다니 장하다’는 것이죠. 물론 석순과 녹지의 경우는, 이미 재정에 있어서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활동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배경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매체의 성격은 어떤 사람들이 만드느냐에 따라 180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척박한 땅’에 대한 얘기가 나온 김에, 이화여대 여성위원회 활동을 했던 때가 떠오르네요. 1997년이었을 거예요. 당시 연대활동을 통해 고려대학교 여학생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친구를 알게 되었는데, 고려대학에서의 여성주의 활동은 너무나도 적대적인 환경 속에 이루어졌기에 종종 위로를 전하러 가곤 했답니다.
 
여성문화제 기간에 학내 공간 중에서 성차별적인 곳에 깃발로 표시를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남학생들이 여학생휴게실로 대거 몰려갔던 에피소드는 귀여운 짓에 불과했죠. 애써 만들어 붙인 플랜카드가 하루도 안돼 찢기는 상황은 좀 포악했지만요. 지금이야 학내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겠지만, ‘무관심’이라는 벽은 어쩌면 더 높아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지 내용을 보니, 아마도 대학 내 여성주의 매체를 만드는 사람들의 고민 중 상당 부분이 이 문제와 관련이 있을 듯 하군요. 이에 대해선 차차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
 
먼저, 언론의 특성과 관련하여 내 의견을 전하고 싶어요. 학생 신분의 기자들은 자신이 사회 언론인에 비해 비교적 한정된, 작은 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매체가 다루는 주제와 독자의 범위를 본다면 물론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학생이라는 지위의 특성상 노동문제와 같이 생존권에 있어 중요한 이슈를 다룰 때, 현실을 잘 조망하지 못한 채 이론적으로 (또는 이념적으로) 접근하는 등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지요.
 
우리는 주로 매체 시스템의 규모나 보도분량, 독자 수 등을 따져서 크고 작고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역할에 있어서 만큼은 대학매체가 작다고 보지 않아요. 각 매체의 특성이 있다고 여길 뿐이지요. 세계각국의 소식을 전하는 뉴스프로그램과 어느 지역의 동네신문을 비교했을 때에도, 그 특성이 다를 뿐이지 역할에 있어 어느 쪽이 크다 작다 판단하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언론에서만 다룰 수 있는 내용이 있고, 같은 사안도 학생들의 시선으로 담겼을 때 역시 같은 학생인 독자들 눈높이에 좀더 맞춰서 다가갈 수 있지요. 특히 요즘처럼 “20대”라는 세대 자체가 키워드로 부각된 시기에, 학생들이 직접 발언하고 담론을 생성하는 과정은 대학의 담장을 넘어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도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성주의 언론’ 또는 여성주의와 언론
 
그럼 이제부터 여성주의 언론에 대해, 또는 ‘여성주의’와 ‘언론’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할게요. 언론은 사실성과 객관성, 그리고 공정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지요. 여성주의 언론은 이중 특히 ‘객관성’과 관련한 부분에서 논란이 됩니다. 어떤 사안을 보도하는 기자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거기에 여성주의라는 이물질이 들어가면 편파적인 보도를 하게 되지 않냐는 지적을 받는 것이지요.
 
나는 기자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기자도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자세를 갖고 있지는 않다는 걸 먼저 인정한다는 점이지요. 또한 언론은 특정 사안을 독자들에게 보다 ‘객관화’하여 전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언론도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언론이 이미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때, 오류가 시작됩니다.
 
모든 매체는 색깔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색깔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독자들이 어떤 매체를 좋아하거나 그 보도활동에 신뢰를 갖는다고 했을 때, 그것은 그 매체의 논조와 기사의 방향에 동의하거나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사실 아무 색깔도, 방향도 없는 매체는 언론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때의 객관성이란, 매체의 색깔에 맞춰 부풀리기나 끼워 맞추기 식의 왜곡이 일어나지 않게(한국의 많은 언론들이 지키지 않고 있는 윤리이지요) 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언론의 ‘객관성’과 ‘여성주의’의 관계는, 또 하나의 큰 원칙인 ‘공정성’의 배경 하에 설명이 되어야 합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언론들이 전혀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성주의 언론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는 것입니다. 여성주의 저널리즘은 언론들이 실제로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으면서도 마치 순도 100%의 객관성이 있다는 듯 포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미 공정성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쯤에서 <일다>라는 매체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일다’라는 말은 옛 우리말로 ‘이루어지다, 되다’라는 소망의 의미를 담고 있지요. 이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뜻도 가지고 있는데 ‘물결이 일다, 파도가 일다’ 할 때의 생성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쌀을 일다’ 라고 할 때, 체로 쳐서 쭉정이와 알갱이를 거른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정보를 건져서 전달하는 언론의 기능을 감안했을 때, 어울리는 이름이라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이제 ‘거른다’는 의미로, 여성주의와 언론의 관계를 설명해보도록 할게요. 주류 언론들은 이 변화무쌍하고 사건 많은 사회에서 비슷한 내용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우화적으로 비유하자면, 세상이라는 그림을 다수 언론들이 녹색 계열의 색깔을 대부분 빼버리고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론들로부터 버려진 녹색 계열의 색깔을 주로 담는 매체를 만들기로 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림에 녹색 계열의 색깔이 포함되었을 때 어떻게 달라 보이는지, 원래 어떤 그림이었는지 알려나가기로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성주의 저널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나는 독자들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야기가 이곳에는 있군요” 라고 할 때, 혹은 “아, 그 사건을 이런 시각으로 보면 전혀 다른 내용이군요” 라는 반응을 보일 때, 그것이 곧 “이 언론이 한국의 언론시장에 공정성을 부여해주고 있군요” 라는 의미라고 받아들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이슈를 ‘보다 객관화시켜 주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고 말이지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일다>가 세상에 나온 2003년에는 ‘여성주의’라는 용어가 지금과 비교했을 때 정말 알려지지 않은, 게다가 형편없이 대우받고 누가 걸치냐에 따라 왜곡되기 십상인 개념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다>를 만든 이들은, ‘여성주의’라는 이름을 걸었을 때 독자들이 다가가기 어렵고 원치 않는 색깔로 이미지가 덮일 수 있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가 무엇인지 (무엇이 아닌지)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여성주의 저널을 표방한 것입니다.
 
2011년, 이제 8살이 된 <일다>에서 일하는 구성원들은 이전에 비해 ‘여성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애써 부각시키려 노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일다>의 역할을 진단해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설계해가는 과정에서 나름 도출되고 있는 견해인데요. <일다>가 ‘여성주의 저널’로서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어떤 사안들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왔는지 지난 8년간 이미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일다>에게 더욱 중요한 과제는 ‘여성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나가는 일이라기보다, 다양한 여성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문을 더 크고 넓게 여는 것, 사회 곳곳에서 대안을 만들어가는 사람들과 연대의 끈을 더 튼튼히 엮는 것이랍니다. 

<일다> 2011년 2월 18일에 실림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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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5.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서 온 편지

일다와 함께 2011. 2. 15. 14:48

대학 여성주의 매체들의 역할과 고민

<조이여울의 記錄>(5) 대학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서 온 편지 
 
올해 초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 편집위원회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여성주의자로서 언론활동을 한다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청탁서였는데, 그 안에는 현재 대학에서 여성주의 매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진솔하고도 소중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나는 흔쾌히 지난 10년 간 저널리스트로 살아오며 ‘여성주의 저널리즘’에 대한 생각하고 실천한 내용과,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들을 정성껏 담아 회신했다. <석순> 측의 동의를 구해, 우리가 서로 나눈 편지의 내용을 재탈고의 과정을 거쳐 <일다> 독자들과 공유한다. 먼저 석순이 보내온 편지를 개재하고, 이어 나의 답신이 4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위로 혹은 질타 그도 아니면 조언을 기다리는 편지>
 
안녕하세요, 조이여울 님 
저는 석순에서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잇지라고 합니다.
 
이 글은 '여성주의자로서 언론을 한다는 것'에 관한 원고를 부탁하는 청탁서입니다. 하지만 이 글의 본심은 대학이라는 보다 작은 공간에서 여성주의 언론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보다 넓은 한국 사회라는 공간에서 여성주의 언론활동을 하고 있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것입니다. 답답하고 막막했던 고민들을 쏟아내면서 위로 혹은 질타 그도 아니면 조언의 답장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 1983년 창간된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의 창간호 표지

우선 석순을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석순은 80년대 말 대학가를 중심으로 여성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에 세워진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입니다. '여성'의 얘기만이 여성주의가 아니듯 석순에서는 여성으로 은유되어 왔던 소외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쓰기에 쑥스럽지만, 고려대학교 내 <일다>같은 언론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일다가 웹이라는 방식을 통해 글을 배포한다면, 저희는 종이지면을 통해 독자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한 학기에 한 번 정도 발간되며(이제 두 번으로 늘릴 예정입니다), 학생들이 내는 교지대를 통해 인쇄비를 충당하고 있습니다. 35집까지 발간됐으며 현재 36집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이번 36집 <여성주의 저널> 기획에서는 여성주의자가 언론활동을 하면서 겪는 고민과 난관에 대해 풀어내려 합니다. 원래 이 기획은 학내 여성주의 저널인 '석순'의 연대기와 시대적 상황을 엮어 '석순의 역사'를 써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예전의 석순을 훑어보는 글이 석순활동을 하는 현 편집/수습위원들에겐 유익하고 흥미로울 수 있겠으나, 독자들에게는 '뻔한' 옛날 운동권 얘기로만 들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것보다는 좀 더 현재적 얘기를 해보자는 취지에서 지금 여성주의 저널들이 갖고 있는 고민을 풀어내보려 합니다.
 
<석순> <녹지> <앤>… 대학 여성주의 매체들의 고민
 

우선, 다른 학교 내 언론(지면을 갖고 글을 써서 여성주의관련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풀 예정인 집단)들과의 좌담회를 준비했었습니다. 여러 군데 초대장을 보냈지만 각자의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결국 좌담회에 응해준 중앙대 여성주의교지 <녹지>, 성공회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앤>친구들과 속 깊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결국 다들 '힘들다'였지만, 그래도 '힘내보자'라는 결론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런데 좌담만으로 저희의 먹먹한 고민들을 해결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학외에서 여성주의 언론 활동을 하고 계신 분의 경험이 담긴 글을 받아보기 위해 이렇게 메일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일다>는 제가 자주 들리는 사이트 중 하나입니다. <일다>의 기사들은 다른 뉴스에서 시끄러웠던 일들을 (일부러) 안 다루기도 하고, 똑같은 소식을 다루더라도 다른 언론에서 들려주지 않았던 관점에서 서술돼있었습니다.
 
흔히 언론은 '중립적' 관점으로 '객관적' 사실만을 전달하는 수단적인 곳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언론은 어떤 정치색도 띠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 받으며, 만에 하나 정치색을 뚜렷하게 밝히는 언론이 있다면 그 언론은 국민을 호도하며 권력을 남용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식의 언론관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주의 언론'이란 말은 모순된 표현처럼 들립니다. "여성만 대변하는 언론이 무슨 언론이야"라는 '비난'은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언론을 편향된 '정치활동'으로 치환시켜버립니다. 즉 믿을 만한 ‘사실’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는 거죠.
 
고려대 학생들도 석순을 언론이라기보다 ‘활동’하는 곳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겁니다. 활동이라는 표현은 응당 석순에게 어울릴 테지만, 독자들에게 뚜렷한 여성주의라는 색깔은 거부감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때문인지 사실 석순의 독자가 많은 편은 아닙니다. 생산된 글이 읽히지 않는 것만큼 비극적인 일도 없을 겁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공론화시키고 싶어도 읽어주는 사람과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적어 그 영향력과 파급력이 미미합니다.
 
독자가 적다는 일은 또 다른 의미에서 비극(?)적입니다. 석순은 교지대를 받고 있어 다행이지만, 일반적으로 독자의 수는 곧 매체를 생산할 자본금과도 직결된 문제니까요. 실제 많은 여성주의 언론이 후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기업이 여성주의 언론을 달가워해 광고를 선뜻 줄 리 없고, 국가 차원의 재정지원을 받더라도 편집권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후원이나 구독료는 언론이 튼튼한 재정구조를 가질 수 있는 가장 믿을 만한 방법이지만, 이건 독자가 많을 때 가능한 얘길 겁니다. 독자가 적은 여성주의 저널은 늘 가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거겠죠.
 
여성주의 언론은 이 세상에서 소외돼왔던 이들의 말을 전하려다보니 ‘언어의 부재’라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말이라는 게 워낙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관념들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심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자칫 오해와 편견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독자와의 지속적인 합의 없이 갑자기 새로운 말을 사용한다면 그 말은 언어로써 제 기능을 못하게 돼버리고요. 그런 측면에서 '비혼'이나 '완경기'라는 단어가 나름 상용화된 것은 정말 기뻐할 만한 일입니다.
 
여성주의 언론으로서 지적받는 또 다른 문제는 맥락이나 상황설명을 조목조목 하다 보니 글이 길다는 겁니다. 우리의 뜻을 제대로 전달해줄 언어가 부재하기 때문에, 일상화된 언어를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생략'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 때문이죠. 조근조근 풀어가며 달래듯 '이래서 이러한 거야'라는 식의 설명은 독자들에게 '계몽적이다'라는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우리가 독자를 계몽하려는 것인가? 우리의 말을 전하는 일이 '모르는 독자'를 '아는 우리'가 가르쳐야 한다는 도그마에 빠져있던 것인가? 독자 스스로 '계몽되어야겠다!'라는 의식을 갖는 일은 반길만한 일이지만, '왜 날 계몽시키려들어?'라는 반감은 글쓴이를 이미 권위자로 인정하고 거기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일 테지요. 그렇다면 여성주의자들은 '계몽' 냄새가 최대한 나지 않게 써야하는 것일까? 자문과 자성이 꼬리를 뭅니다. 여성주의가 권위를 갖는 순간 그 권위마저 경계하느라, 여성주의자들은 할 말을 못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성주의자가 언론활동을 한다는 것
 
그래도, 그래도 저에게 여성주의 저널은 저널로서 하고 있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그것은 '위로'였습니다. 내 탓이라 생각하며 꾹꾹 눌러두었던 경험들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나에게 공감해주는 글들. 거기서 자연스레 위로를 받았습니다. 글을 쓰는 입장이 되었을 때도 줄곧 얻었던 것은 자유롭다는 해방감과 나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여성주의 저널에는 경험담이 많습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 했다"같이 대상화된 정보가 아니라, 나에게서 출발한 말들은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누군가를 향해 손길을 내미는 그런 기사 말입니다. 여성주의 저널은 정보전달자와 정보수용자라는 이분된 관계마저 흩뜨려 놓습니다.
 
그 다음은 '저항'입니다. 지금껏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전하는 일은 불온합니다. 가려졌던 경험들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고 퍼뜨리는 여성주의 언론은 근본적으로 현 체제와 완벽하게 타협할 수 없습니다. 여성주의자들 기질 자체가 그렇다기보다(그런 기질도 없잖아 있긴 합니다만) 체제에서 밀려난 자들이 모인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곳 사정이 단일한 것만은 아닙니다. 저마다 위치가 다르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다릅니다. 동일한 사람도 어떤 곳에선 소외자이지만 어떤 곳에서는 권력자가 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소외를 생산하는 위계적 구조만큼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가부장제 구조는 물론 자본주의 질서와 인종과 장애 그리고 성적지향에 따른 차별주의에 맞서 위계적 구조를 허무는 게 여성주의 언론의 역할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여성주의 언론은 할 일이 넘쳐 일손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 "내가 아무리 말해도 세상은 너무나 온전합니다." © 일다

하지만 그 역할들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생각해볼 때마다 답답하고 암울하기만 합니다. 내가 아무리 말해도 세상은 너무나 온전합니다. 여전히 독자들은 무관심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말이 늘어 갑니다. 저항이 무력하다는 의구심이 뚜렷해져 갈수록 차라리 침묵하고만 싶어집니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는 우리가 작고 낮은 산에서 외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더 높은 산에 오르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우리의 목적은 크고 높은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변자들이 중심을 해체하기 위해 또 다른 중심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소외자들이 겪는 딜레마입니다. 여성주의가 태생적으로 크고 높은 산일 수 없다는 게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이런 모순이 운명 같아 슬프지만, 그 만큼 할 말이 많다는 증거이기에 "힘내자"라고만 자꾸 되풀이합니다. 그런데 그 힘 무엇으로 내야 할까요? 있던 힘도 빨아가는 세상인데 말입니다.
 
'연대'는 낙담하는 여성주의자를 위해 있는 단어 같습니다. 나 혼자라는 지독한 외로움이 가실만큼 함께 하자는 말은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니까요. 하지만 그마저 약발이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연대는 단순히 같은 사람끼리 모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차이를 살펴 그것을 드러내고 함께 할 수 있는 지점들을 모색하는 일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연대입니다.
 
그런데 이제껏 저는 ‘같은’ 여성주의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나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는 작업에 인색했던 것 같습니다. 여성주의자라면 응당 나와 같다고만 생각한 것이죠. 길을 잃은 것 같기도 하고 동아줄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합니다. 새삼 견고하고 높다란 탑이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내가 이 탑과 싸워 무너뜨리기보다 내가 이 탑이 되는 게 빠른 세상이 원망스럽습니다.
 
조이여울님의 답장을 기다립니다.
 
여성주의 저널활동을 해오면서 겪었던 보람과 회의, 그렇지만 지금까지 계속 활동을 하게 한 힘, 현실적으로 여성주의 저널이 당면한 문제와 나름 그에 대한 비책(!). 여성주의 저널 전반에 대해 가졌던 단상들을 들려주신다면 그것은 석순의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잇지)

<일다> 2011년 2월 15일에 실림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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