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강간’ 최초 인정한 판결이 갖는 의미

일다와 함께 2009. 1. 17. 00:20


2002
년 울산에서는 한 남성으로부터 지속적인 구타와 강간을 당해 온 여성이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그 남성이 자는 동안 목을 졸라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늘 강간을 당했다. 강간을 피할 수 없었다”고 진술한 그 여성이, 10여 년간이나 세상에 구조요청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한 가지다. 그것은 가해자가 그 여성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정조권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16, 부부관계에서 강간 혐의를 인정한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2004, 서울중앙지법이 아내를 성폭행한 남편에 대해 강제추행 혐의를 적용한 이래, 부부관계에서 아내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인정한 판결로 주목할 만하다.

 

부산지법 제5형사부(재판장 종주 부장판사)는 필리핀 여성인 아내를 흉기로 위협해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기소된 한국인 남편에 대해 징역 2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번 판결이 우리 사회에서 화제가 되는 것은 바꿔 말해 지금까지 우리 역사 속에서 ‘아내’라는 이름의 여성들은 남편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해도 법이 구제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들이 겪은 피해가 성폭력이라는 사실조차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내의 몸을 남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로 보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인식은 성폭력 범죄를 부녀에 대한 정조 침해의 죄로 바라보는 사회적 통념과 맥을 같이 한다. 성폭력을 한 남자(남편 혹은 남편이 될 자)의 소유인 여성의 몸을 다른 남성이 침범한 행위라고 보았을 때, 부부 간에 강간죄는 성립되지 않게 된다. 정조라는 개념 자체가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적인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을 뜻하므로, 아내와 남편 상호간에는 침해할 정조권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시각은 결국 결혼한 여성에겐 지켜야 할 정조는 있으나 성적 자기결정권은 없는 것으로 본다.

 

강간인데 강간 아니다?

 

여성운동진영에서는 수년 전부터 남편으로부터 폭력과 더불어 성적 학대를 겪는 아내들의 숱한 사례들을 토대로 아내 강간을 인정하라고 요구해왔다. 배우자로부터 가해지는 성폭력은 피해자에게 더 큰 굴욕감과 무력감을 주며, 일상적인 공포에 시달리도록 만든다.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테두리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피해자는 가해자와의 관계망을 벗어나기 어렵고, 지지기반도 없어 그 피해와 후유증도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부부 간 성폭력을 인정하라는 주장은 사회적으로 다분히 급진적인 것으로 읽혀져 왔고 법조계 인사들을 비롯한 많은 남성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아내강간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의 주장은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 부부 사이에 성폭력이 있을 수 없다는 것과 성폭력을 행사했다 하더라도 처벌해선 안 된다는 것.

 

부부 사이에 어떻게 성폭력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이들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성폭력을 정조권 침해범죄로 보고 있으며, 여성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폭력과 성관계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남편이 아내를 강간했다 해도 처벌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성폭력 가해자의 편에 서서 강간인데 강간이 아니다라는 모순된 주장을 해왔다. 그런데 이 같은 주장이 바로 우리 대법원이 1970년에 내린 판결의 내용이다.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경우에는 설령 남편이 폭력으로써 강제로 아내를 간음했다 하더라도 강간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보수적인 한국 법조계의 관행상 이 판례는 30년간이나 족쇄가 되어 우리 사회에서 부부 간 성폭력을 은폐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법원, 왜곡된 통념 깨는데 제 역할 하길

 

2004년 남편의 아내에 대한 강제추행 행위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판결에 이어, 이번 판결이 특히 반가운 이유는 재판부가 성적 자기결정권의 개념을 명확히 했다는 점이다. 검찰은 30년도 더 묵은 대법원 판례를 들먹이며, 남편에 의한 강간사건을 아예 기소조차 하지 않아왔다. 이번 판결도 참으로 늦었다는 판단이 들지만, 기존의 판례를 교과서로 삼는 우리 법조계의 뒤떨어진 현실감각과 인권의식 등을 감안했을 때 박수를 보내야 할 일이다.

 

이번 판결이 그간 성폭력에 대해 떨치지 못하고 있던 사회적 통념들을 떨궈내고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하리라 본다. 그리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수많은 판례들-- 목숨을 건 반항을 한 증거가 있어야만 강간을 인정한다든가, 보호해야 할 인권은 따로 있다는 식의--을 이제 더는 접할 수 없게 되길 바란다.

 
(이 글은 필자가 2004년 8월 법원판결에 대해 논평한 것을 토대로 재구성했음.)

Trackbacks 4 : Comments 12
  1. 산모롱이 2009.01.17 01:03 Modify/Delete Reply

    조금씩 이나마 발전하고 있어서 기쁨네요.
    맨날 밥맛없는 자들 이름만 듣게 되는데
    이런 판결내린 판사님(고종주)의 이름을 알리고 박수를 보내고 싶다.

    • Favicon of https://cognate.ildaro.com BlogIcon 조이여울 기자 cognate 2009.01.17 21:07 신고 Modify/Delete

      어찌보면 당연한 판결이기도 하지만, 법원의 판결문에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사실이 감동을 주긴 해요.

      산모롱이님 반갑습니다.

  2. 정심 2009.01.17 12:01 Modify/Delete Reply

    아무리 부부라도 칼을 들고 성관계를 요구하는 것은 강간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군요.
    부부간에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거늘 흉기로 위협해 욕을 보이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다면 그게 무슨 부부겠습니까

    • Favicon of https://cognate.ildaro.com BlogIcon 조이여울 기자 cognate 2009.01.17 20:47 신고 Modify/Delete

      국경을 넘어온 결혼이주여성은 특히나 남편으로부터의 학대나 성폭력과 같은 범죄에 취약할 테지요. 자원이 부족한 이들에게 더 많이 관심을 기울여야 겠습니다.

  3. kyae 2009.01.17 12:33 Modify/Delete Reply

    부부 간에도 성폭력은 범죄행위입니다. 부부생활에 있어서 성관계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강압적인 성관계까지 법이 옹호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향적인 판결을 내린 판사 이름들은 기억해줄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4. 순발 2009.01.21 17:29 Modify/Delete Reply

    이런 문제가 논란거리가 되는 이유는 부부관계의 모호성 아닐까요? 부부강간이 성립되기 이전에 안전장치가 부족해 보이는.. 성에 관해 여자가 약자인지 남자가 약자인지 조차 막연하고, 부부간 성생활이 상호 의무인 만큼 잠자리를 강요하는 행위를 제한한다면, 거부하는 행위도 제한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결혼은 두사람이 합법적으로 성행위를 하기로 한 약속 또한 사실 아닌가요? 그 약속을 깬건 여자가 먼저라고 봅니다만~ 그 경우 이혼은 물론 위자료도 여자의 책임이라면... 부부강간이 힘을 얻을 것 같고 지금같아서는 곤란하다는 생각

  5. 순발 2009.01.21 17:33 Modify/Delete Reply

    그리고 참고로 제 와이프도 필리핀 여자입니다만..... 전 솔직히 밤이 무섭습니다.
    남자도 거부할 권리같은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하지만 아내를 만족시켜야 하는 것 또한 제가 결혼한 이상은 제 의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로간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문제를 법정까지 가서 남편을 또는 부인을 죄인으로 만들겠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 아닌가요?
    여기 긍정하신 분들 글을 보면 상당히 진보적인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저 생각일 뿐입니다. 실제 자신의 문제가 아니거나, 그러한 문제를 양상하는 생각으로 보이고, 그저 자기할 도리만 다들 잘하고 살았으면 좋겠네요 ^^

    • 살구나무 2009.01.22 00:10 Modify/Delete

      부부 간에 일방이 성관계를 거부하는 것은 이혼 사유가 되지요. 강간을 해도 되는 사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6. 순발 2009.01.24 10:25 Modify/Delete Reply

    그래서 첫글에 적은 것처럼 여성이 성관계를 거부할 경우 이혼은 물론 위자료를 지급해야한다는 것 또한 성문법화해야 부부강간을 성문법화한 것이 타당한 일이라고 본다고 말한겁니다.
    제 댓글 어디에도 강간이 정당하다고 말한 적 없고, 이러한 논의가 말꼬리 잡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번 자살 사건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라는 것과 그것을 성문화하는 제도라는 것이 낮은 수준에서 끝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 것인지 보여주는 사례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멋진 한개의 단어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더 깊게 사고해야 할 거라고 봅니다.

    • Favicon of http://cognate.ildaro.com BlogIcon 살구나무 2009.01.24 14:17 Modify/Delete

      님의 설명을 보니, 위자료에 대한 윗글의 언급이 무슨 뜻이었는지 조금 이해가 가는 군요.
      제 글은 부부싸움이나 성관계 거부와 같은 일들과, 가정폭력이나 부부강간과 같은 형법상 범죄행위와는 다른 범주로 두고서 그 전제 하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폭력 범죄의 경우에는, 이번 법원의 판결내용에서도 그렇지만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였는가 여부가 관건이 됩니다.

  7. 순발 2009.01.24 17:22 Modify/Delete Reply

    성적자기결정권이란 말 자체가 너무 어렵게만 느껴지는군요. 그 권리를 주장하고 또 다른 누군가가 판단한다는 것.....

    결국은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그 몇십년동안 내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서로의 요구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요?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서로간의 차이로 인한 여러가지 문제를 만드는 것이고, 또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이도 저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생 아닌가요?

    그 속에서 가끔 느껴지는 행복감에 즐거워하고, 그런 기억을 남기고 싶은 삶을 모두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요?

    어디까지가 정의이고, 어디까지가 죄일까요? 제가 남기고 싶은 제 마음은

    그 판결에 대한 정보가 그닥 많지 않으므로 단순히 판결 자체가 전향적이라는 이유로 죽어서 더이상 말하지 않는 남자를 강간범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알려진 것처럼 칼을 들고 위협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남자의 행위는 범죄이고, 강간죄의 성립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전의 과정에서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죽은 사람의 삶을 우리가 직접 살아보면 무엇이 문제인지 접근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올바른 판단을 하고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지는 모르는 것 아닌가요?

    우리 모두 화내는 것이 나쁜 것인줄 알면서도 가끔은 화를 내는 잦은 실수를 하는 사람들일지도...

    암튼 님의 글에 반론을 하고 싶거나 토를 달고 싶은게 아니라 그 일(필리핀 여성과 결혼한 남자의 폭력과 자살)에 대해 생각이 좀 많아져서 글 길게 남겼네요..... 이해하시고, 제 와이프 말로는 남자친구 혹은 아이까지 있는 필리핀 여성이 돈 때문에 한국사람과 결혼하는 일이 종종 있고, 그런 경우 어떤 여성은 결혼 후에도 대부분 성관계를 거부한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 여성도 한국으로 온 후 4개월 이상 한차례의 성관계도 허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은 결혼생활(한국여자) 4년중 10회가 되지 않는 성관계에 남자가 매일 술로 살고 가끔은 집을 부수더군요... 가출도 했었고, 제3자인 제 생각엔 그냥 이혼하고 말지라고 생각도 했지만. 남자가 좀 고지식해서 바람피우거나 이혼하는 쪽은 잘 생각 안하더군요. 그래도 지금은 좀 안정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요^^

    사람들의 일이라는게 본인이 아닌 다음에야 잘 알기 힘든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반사회적인 일들이 많더군요..... 법은 그 다음의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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