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나이란 무엇인가
Posted 2009/04/22 13:55'장유유서' 규범 속 아이러니한 노인소외
사람이 많은 지하철을 타면 노약자석과 자리양보를 둘러싸고 긴장감을 느끼게 될 때가 종종 있다. 노약자석에 젊은 사람이 앉거나,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승객이 있으면, 어디선가 불호령이 떨어질 지 모를 일이다. 젊은 사람들 중엔 노인들의 태도가 위압적이라고 못마땅해하는 이들도 있다.
노약자석과 노인에 대한 자리양보는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경로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모습 속에서 ‘노인들의 소외’를 생각해보게 된다. 노인들은 다른 세대들과 한데 섞여서 자신의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다. 사회는 이들에게 편히 가시라고 지하철 좌석은 내주어도, 일자리는 내주지 않는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몸의 변화를 가져오고 삶의 경험이 축적되는 순차적 과정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나이가 갖는 의미는 그 이상이다. 나이가 갖는 무게가 너무 무거운 나머지, 개인의 다양한 삶과 관계 속에 자연스럽게 배치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숫자에 불과’하다고 얘기되는 나이가, 실제로는 사람들의 삶과 관계 전체를 규정하거나 잠식해버리기도 한다.
‘장유유서’의 규범이 있는 우리사회에서 사람들은 나이에 따라 쉽게 위계를 정한다. 세대가 다른 사람, 아니 불과 두세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사람들조차 동년배가 아니라는 이유로 친구관계를 맺지 못한다. 수평적인 편한 인간관계가 아닌, 수직적인 불편한 관계이기 때문에 의견을 자유롭게 교류하기가 껄끄럽고 대화는 단절된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이가 적은 사람보다 아랫사람일 경우,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조직 차원에서 곤란해한다. 불과 27, 28세까지를 신입사원 채용연령의 한도로 정한 회사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기회를 상실한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다. 해당분야의 경력 없이 새로운 전문분야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30대 이상 전 연령대 사람들에게 제한되어 있다.
너무 어려서, 혹은 나이가 많아서 할 수 없는 것들
우리 사회에는 나이가 어려서, 혹은 나이가 많아서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아이가 갖고 싶어하는 건 다 사주고 싶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겠다는 양육자도 정작 자신과 다른 아이의 가치관에 대해 묻거나 귀 기울여주지 않는다. ‘네가 뭘 알겠냐’며, 자녀의 인생행로를 본인이 결정하려는 부모를 쉽게 볼 수 있다.
중년, 노년기의 사람들이 젊은이들처럼 옷을 입거나 사랑을 하거나 모험을 꿈꾸면 ‘나이 값 못한다’는 시선을 받기 일쑤다. 심지어 여성들은 삼십 대의 젊은 나이에도 ‘여자로서’ 경쟁력이 떨어진다, ‘한 물 갔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엄연한 장유유서의 질서 속에서도, 오히려 한살이라도 더 젊게 보이려고 애쓰게 되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개인이 삶의 방향을 선택하고 타인과 소통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기엔 나이가 너무 무겁다는 것이다. 나이에 따라 정해진 규격이 있어서 개인이 그에 맞추어 가야 하는 사회는 민주주의나 다양성과는 거리가 멀다.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어리다는 무시와 늙었다는 괄시를 경험하게 되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과도 거리가 멀다.
나이 든다는 것이 액면 그대로 몸의 변화와 인생의 경험으로써 인식되고, 한 개인에게나 타인과의 관계망에서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는 없는 걸까. 나이를 중심으로 위계와 구획이 정해지는 세상보다는, 연령대가 다른 사람들이 친구가 될 수 있고, 토론을 할 수 있고, 함께 동료로서 임금노동 할 수 있는 세상이 훨씬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이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조이여울/저널리스트, <여성주의 저널 일다> 소속
'일다와 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기형도 (2) | 2009/11/15 |
|---|---|
| “얼굴 있는 생산자가 되고 싶어요” (0) | 2009/10/27 |
| 한국사회에서 나이란 무엇인가 (3) | 2009/04/22 |
| 故 장자연씨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2) | 2009/03/18 |
| ‘부부강간’ 최초 인정한 판결이 갖는 의미 (12) | 2009/01/17 |
| 바느질하는 여우님의 도토리 선물 (6) | 2008/11/05 |
Trackback URL : http://cognate.ildaro.com/trackback/54
-
나이에 갇히지 않는 나이듦에 대하여
Tracked from 일다의 블로그 소통 2009/04/22 17:57 Delete
-밸리댄스 춤을 아이들과 함께 추며 밸리댄스를 다시 시작한 지 벌써 몇 주가 지났다. 아직도 첫 수업에 들어가서 당황했던 걸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첫날, 교실에 귀여운 꼬마들로 가득한 것을 보고 난 교실을 잘못 찾은 줄 알았다. 그런데 그 꼬마들이 바로 밸리수업을 함께 받을 학생들이었다. 나 같은 어른 수강생은 불과 몇 명밖에 되지 않았고, 대부분은 유치원생, 초등학교 저학년인 어린이들이었으며, 심지어 여섯 살 난 꼬마도 둘이나 있었다. 알고 보니.. -
홍대에서 열린 <나이 없는 날> 축제 탐방기
Tracked from 별나라 고고싱 2009/09/14 14:24 Delete
민우회_ 이상한 나라의 폴 존 레논의 ‘Imagine’을 듣고선 막연하게나마 천국, 국가, 종교가 없다면 어떨까 라는 상상은 해볼 수 있었는데요. 나이가 없을 수 있다는 상상은 생각도 못해봤던 것 같아요. 나이... -
[릴레이] 나이 4문 4답- 웃지 못할 사연들을 찾아서
Tracked from 별나라 고고싱 2009/09/14 14:24 Delete
생각해보면 나이 때문에 벌어지는 웃지 못할 사연들 하나쯤 가지고 있지요? 어려보인다는 이유로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반말을 듣게 되는 경우는 부지기수이고, 좋아하게 된 아이돌 그룹 팬카페에서 사진을 좀 ...
세미예
| 2009/04/22 14:11 | PERMALINK | EDIT | REPLY |나이는 숫자일 뿐입니다.
숫자가 더해지고 더해지는 것이지요.
의미를 부여하면 너무 삶자체가 무겁습니다.
숫자일뿐이라고 생각하고 살면 삶이 즐겁습니다.
hats
| 2009/04/22 20:21 | PERMALINK | EDIT | REPLY |어릴 적엔 어리다는 이야기가 듣기 싫고 나이주의에 대한 반감이 많았는데, 나이 듦이란 것이 갈수록 참 더욱 어렵고 무겁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이 듦에 대해서 불안감이나 회환 같은 것이 더 많은 세상인 것 같아서요. 하지만 나이 든다는 것의 좋은 면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조금 바라는 점이 있다면 세대간 교류가 지금보다 쉬웠음 하는 것이랍니다.
잠신
| 2009/04/24 23:14 | PERMALINK | EDIT | REPLY |나이는 결코 숫자일 뿐이 아니라는 것. 한국에서 나이는 계급장인 것 같아요. 근데 그 계급은 한 방향으로 뻗어나가지도 않아. 누가 그 계급장을 어떻게 달고 다니느냐 하는 것인 것 같아요.